행복한 수행! 요즘 누가 질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행복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이 또한 즐거운 고(苦)임을 알게 되니 은혜로울 뿐이다.

왜 이런 조화가 내게서 일어나고 있을까? 11살 때 이웃에 있던 유성교당을 놀이터 겸 피신처로 삼기 시작하면서 그 씨앗이 뿌려진 것 같다. 12세 때, 엄마가 2대 교무였던 한도봉 교무님께 둘째 오빠가 원광대 약대에 다닌다고 하니 입교를 적극적으로 권하자 쾌히 받아들이고 교당에 다니면서부터 나의 교당 생활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교무님이 혼자 계셨기 때문에 엄마가 교당에 가서 자라고 하면, 심지어는 내 전용 이불까지 두고서, 자기도 했다. 교무님은 옆에서 쌕쌕거리며 자는 내 숨소리만 들어도 든든했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부모·형제·친척을 모두 북에 두고 온 실향민이었다. 6남매를 키우느라 많은 어려움이 있어서인지 교육자 집안임에도 장롱 위에 신주 단지를 모셔놓고 3년에 한 번씩 굿을 하기도 했다.

이러던 어머니는 교당에 다니면서부터 신주 단지도 정리하고, 교당에 쌀이 떨어졌는지, 손님이 왔는지, 교무님이 혼자 주무시는지 등등 교당 살림살이를 챙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나도 자연스럽게 교당과 하나가 됐다. 시험 볼 때면 법당 마룻바닥에 엎드려 공부를 하기도 했고, 엄마한테 혼날 것 같으면 교당으로 도망가기도 하면서 교당을 내 놀이터와 은신처로 알고 자랐다.

돌이켜 보면 그립기도 하지만, 참 자력이 없었던 때였다. 교무님이 좋으면 학생회 활동도 열심히 하고, 아니면 안하기도 하다가. 25세 때 류백철 교도와 결혼을 했다.

행사 교도였던 남편을 교당에 같이 다니자고 종용도 하며 엄마와 함께 일반 법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으나, 이 때에는 교무님 설교가 재미가 없고 어렵고 졸리고 집중이 되지 않아 설교가 끝날 때쯤이면 미리 나올 때도 있었다.

결혼 전 데이트할 때, 연구소 퇴근 버스 시내 종점 근처에 서점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약속 장소는 서점인 경우가 많았다. 정신 세계 책을 좋아하던 남편은 제일 먼저 그쪽으로 가 신간이 있는지 섭렵을 하고는 전공 서적 코너로 가는 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결혼 전에는 남편의 이런 성향이 내 일로 와 닿지 않았기에 무심히 넘겼는데, 결혼 후에는 원불교가 아닌 타 종교와 동양 철학에 심취하는 남편의 모습이 가슴앓이 경계로 다가왔다. 시댁의 내력인지 남편은 동양 철학에 관심이 많은 시아버지와도 얘기 주제로 삼기도 했다. 남편이 불교, 증산교, 단학, 천도선법, 상고사(上古史) 등의 책을 즐겨 읽는 것을 보면서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갈 것만 같은 불안감에 혼자 가슴앓이를 한 것이다.

이런 사상을 담고 있으니 교당에 함께 가자는 내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러기를 5년이 지나고, 원기 74년에 유춘수 교무님이 부임했다. 그때부터 공부가 뭔지 차츰 알게 됐고, 설교 말씀이 마치 나 들으라고 하는 것 같아 졸지도 않았다. 택시를 타고 새벽 기도를 다니기도 하고, 어릴 때처럼 교무님 방에 누웠다가 가기도 했다.

이 무렵 임신 8개월 만에 셋째를 조산하는 큰 경계가 다가왔다. 나는 퇴원해 집에서 산후 조리를 하고 있는데 병원에 있는 아이를 퇴근 후 창 너머로 보고 오기만 하던 남편이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러다가 일주일째 교무님과 엄마가 올리던 쾌유 기도에 동참하는 것이 아이를 위하는 일임을 자각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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