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아이는 52일 만에 우리의 곁을 떠났다. 기도할 일이 없어진 남편은 50일 가까이 기도 정성을 들인 교무님과 엄마가 너무나 고마워 그 은혜에 보은하는 방법으로 입교와 출석을 택함으로써 우리는 아픈 인연을 가슴에 묻고 일원 가족이 됐다.

아이와의 이별이 남편을 교당으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어 원불교에 대한 인식, 즉 성직자가 여자 교무이고 교도들은 여자와 그것도 할머니가 대부분이라는 생각이 없어지면서 행사 교도에서 출석 교도가 되어 우리는 일요 법회, 기도, 청소, 순교, 교당 건축 불사를 위한 판매 등 교당 일에 열심히 합력하기 시작했다. 원기 73년 교구 합창단에 갔다가 당시 대덕연구단지 연구원 부부 모임이 있음을 알고는 이 모임의 월례 법회와 훈련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원기75년에 대덕부부회 회원인 네 가족이 교당에 모이자, 공부를 즐겨하는 연구원들의 특성대로 교리 공부를 자체적으로 해 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박명욱·유도신(현 서면교당) 부부를 중심으로 4년 반 동안 매달 두 번 집집마다 돌아가면서〈대종경〉으로 공부하고 식사, 노래방, 등산도 다니며 공부와 법정을 나누는 법동지가 됐다.

그동안 남편과 다툴 때나 시댁의 일로 마음이 상할 때면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줄 알고 자괴감까지 들 때도 있었으나, 외국 생활 등 다양한 경험과 개방적인 성향을 가진 인생의 선배들로부터 결혼이 핑크빛만이 아닌 어느 가정에나 있을 수 있는 일임도 알게 됐다. 원기78년경 어느 날, 대덕부부회 훈련을 삼동원에서 나면서 정전마음공부를 처음으로 접하게 됐다. 마땅한 훈련 프로그램을 찾던 중, 정전마음공부 훈련은 대덕부부회의 단골 훈련으로 자리 잡으며 대전에서 2,3달 주기로 2년 가까이 지속됐다.

원기78년 유춘수 교무의 의견에 따라 이전 봉불을 하고 남아있던 구(舊) 교당 건물에 어린이집을 열고, 신축 교당으로 이전하기까지 4년간 이를 운영했다. 어린이집 운영비를 아끼려고 떡을 구해 간식으로 먹이기도 하고, 시댁에 갈 때마다 시어머니가 챙겨주는 곡식과 생선은 대부분 어린이집 원아들의 부식으로 사용하며 한 푼이라도 절약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이 무렵 교도들은 똘똘 뭉쳐 교당을 신축하고 남은 빚을 갚으려고 쑥을 뜯어다가 미숫가루도 만들어 팔고, 굴비가 오면 냉장고가 없어 상할세라 밤늦게까지 배달도 했다.

영산성지고 계란, 참기름 등도 마찬가지였다. 교당 일을 내 일처럼 서로 합력하는 모습에 우리는 힘듦도 잊고 뿌듯해 했다. 남편은 법회와 대덕부부회 훈련, 교리 공부 모임, 교당 일 등을 열정적으로 하며 원불교를 알아갔지만, 본인의 근본적인 삶의 변화와 목마름은 해결되지 않아 답답해했다. 그러다가 원기80년 10월경 경계를 따라 마음 작용을 느낀다고 황직평종사께 말씀드리니 "이제 공부할 때가 됐다"며 연말 수계농원 훈련에 참석해 보라고 했다. 이를 계기로 마음공부의 묘미를 체험하게 되자, 원기81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원래 마음에 대조하고 그 마음을 사용하며 성공하고 실패하는 심신 작용 처리 건을 정기 일기로 기재하여 스승님과 정기적으로 문답하고 감정과 해오를 얻는 정전마음공부와 정전 용어 정리, 수계 훈련이면 거의 빠짐없이 달려가는 등 훈련 병(病)에 걸렸다고 할 정도로 너무나 열심이고 환희작약하는 남편과는 달리, 남편의 그런 모습에 나는 서서히 안티가 되어갔다. 세 아이를 키우며 어린이집 운영하랴 하루하루의 생활은 힘듦 그 자체였다. 게다가 짬짬이 집안일을 돕던 남편이 일기 기재, 정전 공부, 훈련 등 정전마음공부에 바람이 났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피우는 바람이 여자, 술, 도박 외에 공부 바람도 있음을 그때서야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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