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기형이 감사의 이유가 됐다

▲ 김희아 힐링강사.
희망연대가 주최한 제10회 공동체 시민아카데미에서 안면기형 장애를 극복하고 힐링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희아 씨가 특강을 했다. 10월12일 익산시 모현도서관에서 김희아 씨는 '내 이름은 예쁜 여자랍니다'란 주제로 자신의 어려웠던 성장스토리를 전해 참가자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내 이름은 김희아이다. 이름이 얼마나 예쁜 이름인가?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람들에게 아픈 이야기도 많이 들었지만 '이름이 정말 예쁘다', '성격 정말 좋다'는 말을 제일 많이 들어왔다. 나의 이름은 내가 자랐던 보육원 원장이 지어주었다. 성은 원장님의 성을 따라서 김씨가 됐다. 보육원 원장은 가장 예쁜 여자가 되라고 희아(姬娥)라고 지어주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지만 나는 태어날 때 남들이 가지지 않는 얼굴에 붉은 점을 가지고 태어났다.

지금은 보육원 아이들도 부모님의 기록이나 가족에 대한 기록을 다 가지고 있지만 70년대 80년대까지 보육원의 아이들은 부모님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그래서 보육원에 버려져서 들어간 그날이 아이들의 생일이 된다. 보육원 원장님이 그 아이의 얼굴을 보고 키를 보고 아이의 나이를 짐작을 해서 나이와 생일을 정해 준다.

부모님이 나를 낳아서 보육원에 데려다 놓았고 원장님이 얼굴에 점이 있는 나에게 김희아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픈 이름이었다. 40년동안 김희아 라는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였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픈 이름이었다. 감사하게도 작년에 내 나이 40이 끝날 때까지는. 하지만 지금 41살이 된 김희아의 이름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로 여러분들이 불러주어서 이 자리에 서게 됐다.

예쁜 이름, 아픈 별명

보육원에서 100여 명이 같이 살았는데 아이들은 나를 '희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귀신','괴물' 그리고 만화속에 나오는 '아수라백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아이들은 그런 별명들을 붙여서 어떻게든 나를 더 아프게 했다. 그냥 '희아'라는 이름을 불러줘도 얼굴의 점 때문에 아프고 슬픈데 '희아'라는 예쁜 이름이 아니라 아픈 별명으로 불러줬다.

어릴때 친구들이 나에게 귀신 같고 괴물 같다고 했지만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괴물같지 않았다. 그냥 보육원에 있는 엄마가 없는 김희아였으며 친구들과 즐겁게 뛰노는 아이였다. 그러나 초등학교 3학년 때 미술시간은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그날도 아침도 친구들과 함께 웃으면서 즐겁게 학교에 갔다.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준비물을 가지고 오지 않은 학생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당시 보육원은 가난해서 우리에게 모든 준비물을 챙겨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앞에 나가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나를 보고 그리라고 했다. 친구들이 내 얼굴을 쳐다보며 도화지에 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남과 북을 갈라놓듯이 내 얼굴에 반을 붉은 색으로 채워놓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다 그린 사람은 그림을 들어보라고 했다. 친구들이 그림을 들어보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친구들이 그린 그림 속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귀신을 보았고 괴물을 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길을 다닐 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었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늘 주눅이 들어있었다.

만약 나도 엄마가 있었다면 엄마에게 "엄마 내 얼굴에 있는 점이 정말 이상해, 괴물같고 귀신같애, 엄마 나도 사람 맞아?"라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가 너무 아프다고 말할 곳이 없었다. 내가 놀림 받았던 그 이유를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는 것 조차 부끄러웠다.

자신감 심어준 은사

그러다가 중학생때 은사를 만나게 됐다. 그때 나는 키가 작아서 제일 앞자리에 앉았는데 선생님은 늘 기 죽어있고 고개 숙이고 있는 나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했다. 선생님은 칠판에 문제를 써놓고는 나를 쳐다본다. 그 정도의 문제는 나도 풀 수 있다는 미소를 보내면 선생님은 나에게 그 문제를 풀게 한다. 그때 처음으로 선생님에게서 '희아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다. 선생님의 칭찬으로 나는 자신감을 얻었다. 선생님이 칭찬을 해줬기 때문에 늘 머리로 얼굴 점을 가리고 땅바닥만 보고 다니던 내가 다른 사람의 허리춤을 보고 걷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칭찬으로 나는 밝게 웃고 목소리도 커졌다.

얼굴의 점은 감사의 이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우리는 보육원을 떠나야 했다. 20살이 돼서 성인이되면 자립을 해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취직도하고 결혼도 해서 잘 사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하지, 누가 나를 받아줄까, 사람들이 얼굴에 점이 있다는 이유로 나를 무시하고 마치 죄인처럼 멀리하는데 내가 과연 취직 할 수 있을까'고 고민하고 있을 때 보육원 원장님이 나를 불렀다. 원장님은 나를 보고 "희아 고등학교 졸업하면 여기서 나가지 말고 보육교사로 일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보육교사가 됐다. 공부 잘하고 예쁜 아이들도 많은데 왜 하필 나를 여기에 취직시켜 주었을까 생각해보니 얼굴에 있는 이 점 때문이었던 것이다.

원장님이 나를 보육원에 취직을 시킨 것은 공부를 잘해서도 아니고 예뻐서도 아니고 똑똑해서도 아니다 이 얼굴에 있는 점 때문이다. 그때부터 이 점은 감사의 이유가 되면서 누가 물어보면 나는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얼굴에 점을 가지고 태어났다. 입밖으로 내 뱉었을 뿐인데 내 마음에도 감사의 마음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어떤 남자가 옆을 지나면서 내게 한 마디했다. 아무런 이유없이 나를 보면서 지나가면서 하는 말이 "어휴~ 밥맛이야"라고 하는데 그 말은 지금까지 들어왔던 귀신이나 괴물 같은 말보다 더 아프게 들렸다. 나는 주저앉아서 울면서 기도를 했다. '하느님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 밥맛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은 내가 얼마나 아픈지 모르고 그랬습니다. 벌을 주지 말고 축복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했다. 이렇게 기도를 하니 내 마음이 편안해 졌다. 그러면서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로 살아가겠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아무리 나를 귀신같고 괴물같이 봐도 거울 속에 비친 김희아는 예쁘고 아름다웠다. 이 점도 내가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나에게 있다고 생각됐다. 사람들이 나에게 그렇게 험한 말을 했을 때도 내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나도 살아갈 이유가 있음을 깨달았다.

사랑으로 암 극복

그러다가 나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렇지만 내 얼굴에 있는 점을 숨기고 만났기 때문에 남자친구나 나의 모든 것을 알고 나면 나를 버리지 않을 까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버려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 줄 알기 때문에 두려웠다. 얼굴에 점을 화장으로 숨겨오다가 1년만에 들키게 됐다. 마음 속으로 버려질까 두려웠는데 남자친구는 나를 떠나가지 않고 당신의 옆자리에 여자친구의 자리를 내어주었다. 연애가 2년이 다 되어가던 때 갑자기 나에게 또 큰 시련이 닥쳤다. 얼굴이 무너져 내리는 상악동암에 걸렸던 것이다. 그때 내 나이 25세였다. 암으로 얼굴의 반을 잘라내고 동맥과 근육을 이식하는 큰 수술을 했다. 감당하기 너무 어려웠다. 나는 그 암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사랑해줬던 남자친구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이 더 무서웠다.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고 했지만 그는 내 곁을 지켜줬고 4년이라는 투병생활을 같이 해줬다.

우리는 결혼했고 예쁜 딸도 낳았다. 어느 날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데 내 얼굴에 점이 아이의 얼굴에 겹쳐지면서 어머니가 생각났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가 나를 안고 젖을 물리면서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아프다 못해 무서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의 붉은 점이 얼굴에 작게도 아니고 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걸 본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나는 엄마 뱃속에 있는 열달 동안만 부모에게 효도를 했고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불효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TV출연, 책 발간, 강연의 꿈

나는 늘 강연을 하고 책을 쓰고 TV에 나갈거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TV에 나가려고 했던 것은 부모님이 나에 대한 기록이나 흔적을 남겼다면 찾아가서 '나를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릴 수 있었겠지만 어떠한 기록도 남겨 놓지 않아 찾아가서 감사를 전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TV출연이었다. TV에 나가서 부모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면 부모님이 볼 수 있지 않을까? TV를 통해 부모님에게 "나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에게 이 점은 복점입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인사를 올리고 싶었다. 부모님이 나를 버려서 내가 아팠지만, 내가 이렇게 태어나서 부모님을 아프게 한 것도 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강연을 하기 위해서 자격증을 따고 공부를 하러 다닌 것은 한번도 없었다. 어느날 KBS 여유만만에서 주부강사 오디션을 보는데 참가해 보라는 제의를 받았다. 처음에는 대중의 앞에서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두려워서 망설였다. 그때 딸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딸은 학교에서 어머니에 대한 글을 썼다며 읽어줬다. 딸은 글 중간에 "때로는 아픈 엄마가 부끄러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늘 자신있고 감사하면서 긍정적으로 사는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습니다. 엄마 사랑해요"라고 썼다.

딸이 읽어주는 것을 들으면서 딸아이의 눈에 엄마가 이렇게 비춰졌다면, 나는 대한민국에 이력서를 내는 심정으로 오디션에 도전했다. 500명이 지원해서 40명이 서류심사에 통과돼 오디션프로그램에 나가게 됐다. 감사하게도 나는 1등상을 받았고 힐링강사가 됐다. 그 이후에도 KBS '강연100℃' 올해 신년특집으로 방송에 출연했다. <나는 예쁜 여자랍니다>란 책도 발간했다.

나 혼자만 감사를 하고 살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감사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나의 감사는 미완성이 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감사라는 보석이 나의 감사생활을 더 빛나게 해줘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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