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연구소 일외에도 정전과 마음공부와의 사랑에 빠져들수록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난 외로운 여자가 되어갔다. 친정 부모님과 언니들에게 이런 사정을 얘기하면 내 얘기는 들으려고 하지않고 투정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그러면서 수계농원과 교당, 대덕구청소년수련관, 교도집 등에서 열리는 정전마음공부 훈련에 함께 다녔다. 목적은 마음공부였지만, 한편으론 여행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부턴가 심신이 상당히 복잡한 일인데 의연히 넘어가는 남편을 보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어떤 땐 바보가 아닌가 생각하며, 마음공부에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됐다. 그 때부터는 남편의 권유가 없어도 내가 따라 나섰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몰입은 잘 안 됐으나 조금씩 생활에 응용해 보니 매력을 느끼게 됐다. 남편은 대덕부부회 총무를 하면서 정전마음공부 훈련 녹음테이프를 받는 대로 녹음기 2,3대로 복사를 해 회원 집집마다 배달을 하곤 했다.

셋째 딸은 기도를 열심히 하고 낳아서인지 에너지 덩어리였다. 만약 마음공부를 하지 않았더라면, 셋째는 문제아였을 것이고 나 역시 문제 엄마가 됐을 것이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너무나 활동적인 아이의 모습을 에너지로 볼 수 있게 된 것도 이 공부 덕분이었다. '현경이 너와 나는 정전마음공부를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고 얘기하곤 했다. 가끔은 셋째가 일기에 뭐라고 기재했나 묻기도 했다. 나이 차가 많은 아이들을 키우려니 마음을 챙길 수밖에 없었고, 이런 절실함 때문에 마음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주변 젊은 엄마들의 맏언니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생활 속에서 마음공부한 덕분이었다.

결혼 11년째쯤 됐을 때였다. 친정 부모님은 북에 부모, 형제를 두고 와서인지 세 딸이 있는데도 아들이 있어야 된다며 은근히 권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자 어른들의 뜻을 받드는 것도 효도라고 마음을 돌렸다. 원기80년 유춘수 교무님이 편찮은 친정아버지에게 돌아가시면 막내딸에게 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는 웃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9재를 마칠 때쯤 교무님은 100일까지 기도하기를 권했다. 기도가 끝나고 바로 넷째를 임신했다. 노산이라 조산기가 있어 머리맡에는 조산방지약을 두고서 6개월이나 누워 있어야 했다. 이 때, 정전마음공부 훈련 테이프와 공부인들의 신앙 수행담 테이프 30∼40개를 듣고 또 들었다.
출산 전에도, 그 후에도 남편은 오로지 정전마음공부에 일심이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미웠고 섭섭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이가 조금 더 클 때까지 멈췄다가 공부하자고도 했다. 그러나 이미 마음공부가 일상이 되어 버린 남편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온갖 구박에도 꿋꿋이 공부하는 남편이 미우면서도 대단해 보였다. 저 공부가 뭐기에 저렇게까지 하는지 나도 해 봐야겠다고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친정 부모님이나 주위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과 어려움도 있었다. 남편은 어촌에서 태어나 중학교 이후로 쭉 객지에서 공부해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그 이면에는 혼자서 결정하고 헤쳐 나오며 주관이 뚜렷한 양면성을 갖고 있다. 결혼을 결심하게 한 이유 중 하나가 남편의 꿋꿋함이었지만, 살다보니 그것 때문에 힘들었다. 내 생각에 속은 셈이다. 이견이 있을 때 합의한 것 같아도 결국에는 자기 생각대로 하는 걸 보며 너무나 큰 벽을 느끼곤 했다.

나는 6남매 중 막내라 부모님과 오빠, 언니 속에서 자랐다. 이런 성장 배경에서 형성된 가치관의 차이가 주착심이 되어 경계에서는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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