喜 怒 哀 樂 3

모든 것이 다 마음에서 우러나온다는 말은 지극히 타당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마음은 항상 가슴속에 들어 있어서 사물을 정확히 가늠할 수 있는 표준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을 두고 유념과 무념을 대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가슴속에 들어 있어서 사물을 제대로 가늠해 주어야 할 마음이 외출을 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몸 안에 들어 있어야 할 주인공이 밖으로 향해 달아 났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이 세상의 한 가운데 존재해 있는 것이며 그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마음인데 그것이 어느 날 나갔다 치면 참으로 심각한 일이다.

좌우의 한 가운데를 일컬어 가운데'중(中)'이라 하기 때문에 중은 평면적으로 가운데라는 말임에 대하여, 가운데'앙(央)' 은 전후와 좌우와 상하 가운데에서도 한 가운데라는 말로 입체적으로 한 복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딱히 좌우에서도 한 가운데를 잃고, 전후와 좌우와 상하를 다 거느려야 할 복판에 나의 주인공인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토록 중요한 마음이 느닷없이 외출을 해 버렸다면 과연 어찌 될 것인가?

그 중에서도 오랫동안 마음이 외출해 버린다면 과연 어찌될꼬? 한 마음 잘 닦고 길들여 모든 변화에 잘 대응해야 할 마음이 드디어 부풀어 버려 나갔다고 하면 얼마나 심각한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인간의 감정이야 이성보다는 잘 동요될 수 있다고 하여 감정의 조절이 곧 수행의 중요한 줄기라고는 하지만 그 중에서도 성내는 마음이 가장 거칠고 심각한 것이다.

그래서 옛 도인들도 이르시기를 "성내는 마음이 심하면 자못 기운을 상할 뿐이요, 잡다한 생각이 많다보면 정신을 너무나 빼앗길 뿐이다(怒甚偏傷氣, 思多太損神)"라고 일렀던 것이다.

즉 성냄이 심하거나 생각이 잡다하면 기를 잃고 신을 크게 손상한다고 했다.

정신은 '정(精)'을 생명의 기본으로 매일 먹어 실제로 마음의 장수인 기를 기르고, 기를 모아 신을 기른다는 것이 이른바 '정신수양'의 요지인데도 불구하고 기를 상하게 하고, 신을 덜어 버린다면 과연 수양의 뜻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기를 흩어 버리는 주범은 뭐니 뭐니 해도 감정의 동요 가운데에서 오직 성냄이 제일이라, 성을 낸다는 것은 곧 본성을 그대로 지녀 착하게 굴거나 착하지 못한 일을 거부해 버려야 할 '성(性)'이 사물의 꾀임으로 말미암아 외출해 버린다는 말이니 곧 '성을 낸다'는 말이다.

기쁨도 그렇고, 성냄도 그렇고, 슬픔도 그렇고, 즐거움도 다 그렇기는 하지만 유독 성냄만은 더욱 마음자리를 심히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종'노(奴)'에 '심(心)'을 붙여 마음의 노예를 일러 성낼 '노(怒)'라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유무념 대조를 하다보면 마음이 없는 것이 곧 '노'이다. 그리고 '노'는 거듭하면 할수록 포도알처럼 더욱 커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성냄을 제어하지 않으랴?

<문역연구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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