喜 怒 哀 樂 5

인간이 감정의 상태를 가늠하는 말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아무래도 즐거움이다. 왜냐하면 기쁨은 거의 다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으로 희비가 엇갈린다 말하는데 비하여 즐거움은 대개 자신만이 얻어지는 감정이 아니라 사물과 더불어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큰 즐거움은 앎을 통해 얻어진 기쁨과 또 앎을 통해 얻어진 기쁨이 서로 교류를 통해서 즐거움으로 나타나는 것이 즐거움에서 가장 즐거움이다. 이 즐거움이야말로 기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기쁨과 만나 얻어지는 보다 큰 기쁨이다.

그 비근한 예로써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말 다음으로 "어떤 먼 벗이 있어 스스로 찾아와 대화를 나누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한 〈논어〉의 첫 구절을 볼지라도 앞서의 기쁨은 앎의 기쁨으로 자신만의 기쁨이지만 뒤의 즐거움은 서로 나누는 즐거움을 말한다. 기쁨에 기쁨이 더해지는 것이 바로 즐거움인 것이다.

그렇다면 셋째 구절은 어떤 것인가? 즉 "다른 이가 나를 몰라준다고 할지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자신이 모처럼 얻은 기쁨과 즐거움을 남이 해칠 수 없다는 것이 곧 군자라는 말로 내가 얻은 즐거움을 마침내 남이 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 글로써 벗을 사귀고, 벗으로서 어진 마음을 돕는다(以文會友, 以友輔仁)."는 말처럼 벗을 사귀되 글을 통해 사귀고 일단 서로 사귄 벗은 손에 손을 단단히 잡고 서로가 벗으로서 어진 마음을 도와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벗'이란 만나면 만나는 족족 즐거움을 이루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요, 말이나 글을 통하여 만나기 마련이며, 반드시 서로의 향상을 위해 즐거움을 보존토록 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니 즐거움을 보존할 줄 아는 것이 곧 어진 마음을 키워가는 일이다.

사실 성현께서 이 땅에 나오신 뜻은 "잠시라도 참아내지 못한다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 고통을 참아내고 그 고통의 세계를 즐거운 낙원세계로 바꿔 나가자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즉 부처의 본의는 고통을 달게 참고 즐거움을 이루자는 것(忍苦成樂)이 그 최종적인 목적인 것이다.

다른 이의 비방을 들어도 성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남의 칭찬을 들어도 기뻐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남의 좋지 못한 소문을 들을지라도 동조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남의 착한 일을 듣거든 곧 나아가 어울리고 기뻐해야 한다.

그래서 소강절 선생은 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선한 이를 보기를 즐겨하며, 선한 일을 듣기를 즐겨하며, 선한 말하기를 즐겨하며, 선한 뜻을 행하기를 즐겨하라(樂見善人, 樂聞善事, 樂道善言, 樂行善意)."고 일렀다.

궁중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임금이다. 그러나 궁중 내부의 일체를 다스리는 자는 왕비다. 그렇기 때문에 왕비가 거처하는 처소의 이름을 '낙선재 (樂善齋, 착함을 즐기는 집)'라 이름했던 것이다.

<문역연구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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