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길 교무의 '수심결'

旣不知方便故로 作懸崖之想하야 自生退屈하야 斷佛種性者- 不爲不多矣라 旣自未明일새 亦未信他人의 有解悟處하야 見無神通者면 乃生輕慢하야 欺賢광聖하나니 良可悲哉로다.

이미 공부하는 길을 알지 못하는 고로 어렵고 아득한 생각을 지어서 스스로 퇴굴심을 내어 부처의 종성(種性)을 끊는 이가 많지 않다 할 수 없는지라 이미 스스로 밝지 못할새 또한 다른 사람의 깨친 것을 믿지 아니하여 신통이 없는 이를 보면 이에 경만심을 내어 어진 이를 속이고 성현을 속이나니 진실로 가히 불쌍한 일이로다.

11장에서는 공부길을 모르면 퇴굴심을 일어내어 부처의 종성마저 끊어진다는 것을 경계하며, 더 나아가서 깨친 분을 만나도 신통조화를 부리며 보통 사람과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오만방자하게 대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한때 하늘에 뻗치는 꽃발신심으로 구도에 몰두하였다하더라도 끝까지 밀고나가지 못한다면 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도는 중간이 없다. 특신급과 대각여래위가 바로 연결되듯이 그 중간 단계의 법위에 머물렀다고 해서 중간정도는 깨쳤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짚신 세벌을 마음 깨치는 주문으로 받아들이는 순수한 초보단계가 오히려 중간단계를 뛰어넘어 곧장 도의 본질을 더 빨리 깨칠 수도 있는 것이다.

법의 마장은 중간단계에서 더욱 강하게 구도자들을 시험에 빠져들게 한다. 조금 안다는 것은 스승을 의심하게 만들고, 교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자신의 수행방식이 독보적인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앞선 선지식의 겸손한 조언이나 충고도 우습게 들리고 깨친 성리법문도 자신의 생각과 들어맞지 않으면 오히려 반박하고 어설픈 자기 독백을 하기 십상이다.

부처님이나 공자님이나 노자님이나 모든 인간존재에 대하여 평등한 존엄성과 가능성을 부여하셨다. 하지만 그 분들도 제자들을 지도하실 때에는 근기에 따라 방편을 달리하셨다. 근기의 우열을 인정하시고 공부길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지도하기 힘든 근기가 바로 중간 단계에 머물러 있는 중근기라고 하셨다.

소태산께서도 "중근기는 자세히 아는 것도 없고 혹은 모르지도 아니하여 항상 의심을 풀지 못하고 법과 스승을 저울질하는 근기요, 이 사람은 법을 가벼이 알고 스승을 업신여기기 쉬우며, 모든 일에 철저한 발원과 독실한 성의가 없으므로 공부나 사업이나 성공을 보기가 대단히 어렵나니라. 그러므로 중근기 사람들은 그 근기를 뛰어 넘는 데에 공을 들여야 할 것이며 하근기로서도 혹 바로 상근기의 경지에 뛰어 오르는 사람이 있으나, 만일 그렇지 못하고, 중근기의 과정을 밟아 올라가게 될 때에는 그 때가 또한 위험하나니 주의하여야 하나니라"고 하셨으니 어느 시대에나 조금 알고 익숙해져서 매너리즘에 빠져들 때가 가장 위험하며, 주의를 해야 한다고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보조도 이때에 공부길을 잘못잡거나 놓치게 되면 영생길을 그르치며 부처의 종자마저 끊어지게 될 것이라고 경책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중근기에 빠져들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그 답을 중근기는 알고 있다. 전혀 모르지도 않고 다 알아버린 상태도 아니니 분명히 어느 정도 근접한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알고는 있다. 다만 실천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지금까지 수차례 시도해 보았으나 별다른 명쾌한 체험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 원래의 초발심을 회복하는 것, 이것은 다시 정상에 오르기 위해 나침반을 들고 산꼭대기를 쳐다보는 것이다. 목표를 다시 점검하는 것이다. 지금 어디까지 올라오다가 멈추고 있는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는 방향이 틀리지 않았는지를 다시 살펴보는 것이다. 오르고자 했던 정상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다른 곳을 쳐다보지 않고 직진할 채비를 다시 꾸리는 것이다. 이것이 서원이요, 원력이다. 깨침에 대한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또다시 온몸으로 들판에 서는 것이다. 홀로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또 걸어가는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그 외로운 길을! 그렇게 작은 불씨를 하나 얻게 되면 그것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지혜의 횃불이 되어 타오른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도 벽을 보고 앉아 있는 구도자의 뒷모습에 숙연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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