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와 나, 둘이 아닌 하나의 울림

'어려서는 무지개 꿈속에서/ 커서는 미지의 세계에/ 무던히도 꿈을 그리며/ 설계하고 고민하며/ 장년이 되어 꿈을 잠간 펼치다 보니/ 전광화석처럼 번쩍 지나는/ 모든 것이 순간이었다/ 삶이란 무엇이냐 -하략-'
그의 마지막 성가곡 창작집에 들어있는 노래 '삶'의 가사이다.

송관은 원로교무는 "내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음악과 함께한 보은의 삶'이었다"고 말했다.

"원불교 교무로 출가해 좋은 곡을 만들어서 세상과 원불교에서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내가 받은 사명이자 서원이었다. 그 사명과 서원을 이루기 위해 밤낮으로 창작의 고통을 기쁨으로 여기고 정성에 정성을 다했다."

한 곡 한 곡이 자신의 분신이라는 것이다.

올해 72세인 그가 원광대학병원 7층에 입원해 있다. 불현 듯 찾아온 병마. 그는 어떠한 심경으로 병상 수행을 즐기고 있을까. 햇살 따뜻한 겨울 오후, 똑! 똑! 똑! 그의 병실을 노크했다.

성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46곡으로 된 신창작곡집을 묶으려고 한다"며 악보를 하나하나 챙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원불교 성가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 법을 전하려 했다. 말로 하는 것 보다는 즐거웠다. 성가로 그 일을 하면서 '성가와 나는 둘이 아니다. 하나이다'는 생각을 했다. 둘이라 생각해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성가사랑을 강조했다. 성가 한 곡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정성을 다한다.

그는 "음표 하나하나 그리기위해서는 그만큼 힘이 든다.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가사 한 자 한 자도 그렇다. 가사 자체를 어렵게 쓰지도 않았다. 총부 생활을 못하고 따로 생활했던 것은 창작 활동 때문이다. 피아노를 치며 작업을 해야 하는데 총부생활을 하면 피아노 때문에 시끄러워서 안된다. 그래서 사가에서 생활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내가 평생했던 작업들은 대종사님의 명령이라고 생각되었다. 항상 대종사님이 머릿속에 자리하고 계셨다"며 사무치는 그리움이 올라오는 듯 가슴을 다독이며 울먹였다. 정성을 다해 완성된 곡들은 그의 분신이 되어 합창 혹은 연주 될 때면 대종사님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노래라 할 것도 없이 작곡된 노래가 울려 퍼 질 때면 강렬한 느낌이 다가온다. 그는 "교학대 원불교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합창단을 만들었다. 성가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봄밤' 등 가곡도 가르쳤었다. 학생들이 '나비들이 날개 접고 꿈꾸는 봄밤에~'를 흥얼거리고 다니는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된다"며 "'나 길이 여기 살고 싶네' 등 만나기만 하면 부르는 18번 이었다"고 미소를 남겼다.

그는 "'이 생명 다 바쳐'와 함께 곡 자체가 쉬워 즐겨 불렀다"고 회고했다.

죽음 두렵지 않아

그는 퇴임 후 '이명' 치료에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대장암'이 발병, 간과 폐로 전이가 됐다.

그는 "내 병명을 듣고 나도 놀랐다. 평생 병원을 모르고 살았는데, 또 내게는 그런 병이 안 올줄 알았다. 처음에는 당황했다"는 심경을 밝혔다.

말을 잠시 멈춘 후 그는 "생각해 보니 대종사님 밝혀주신 생사해탈 법문에 감탄했다"며 "'아- 참 도움 되는 구나. 그렇지'하고 무릎을 쳤다. 이게 언제 내게 올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고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 절실한 생사해탈 법문을 쉽게 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는 오빠인 융산 송천은 원로교무로 부터 "나는 생사해탈 법문을 어려서부터 들어서 당황되지 않네. 어차피 사람은 다 가는 거 아녀"하고 위로의 말을 들을 때 "그렇지. 가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 두렵지 않다. 다만 일을 얼마나 했느냐가 중요함을 알았다. 대종사님이 우리 외할아버지이니 원불교에 와서 나는 최선을 다 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대종사님은 53세, 아버지인 주산종사도 40세에 열반했는데 올해 72세이면 오래 살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는 여한이 없다. 융산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평생 사는 사람 없고, 또 살면서 병원 자주 간일도 없이 열심히 살았다"며 "우리가 생사공부를 한 사람인데 생명연장까지 할 것 없다는 등 여러 측면에서 나를 위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는 마음이 조급하지 않고 편안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는 "나는 아쉬움이 없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 와서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간다"며 "융산님이 나를 칭찬한 적이 없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니 '걱정하지 말어, 너 훌륭하게 살았잖니'하는 그 말에 형제들이 인정을 하면 됐지, 그렇구나 감사하다. 일찍 나를 데려가는 것도 나 잘 되라고 하는 것이지"하며 대종사님 법 만나 이 일을 한 기쁨과 감사함이 컸다는 심경을 고백했다.

그는 병상에 누워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고맙고 감사합니다'이다. 살고 보니 모든 것이 다 순간이고 또 모두 다 고마운 인연이었다는 것이다.

제자들, 가곡 성가 음악회

그는 22일 제자들이 마련한 '송은 가곡 성가 음악회' 소식을 듣고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어느 누가 자기네들 선생님 아프다고 음악회를 해 주겠냐"며 "나는 한 것도 없는데 제자들이 그렇게 큰 행사를 해주니 여한이 없다.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고 가야할지. 세상에 이런 인재들 또 어디서 얻을 것인지. 참 영광이고 보람이다"는 흐뭇함을 보였다. 제자들이 교당에서 합창지도를 하고 총부 일요법회에서 성가대를 담당하는 것을 보면 대견하고 그저 고마울 뿐이다는 것이다.

그는 남중교당에 다니는 제자 이광욱 교도에게 음악회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고마워, 갔다와서 잘 할께. 나 이생에는 제자들이 베풀어 준 것 다 못 갚고 다녀와서 갚을께. 다녀오면 제자로 받아 주려나 모르겠네. 내가 이 선생 줄줄 따라다닐 것이네"하며 한바탕 진심어린 농담도 건넸다. 이 교도를 아들이라고 소개할 만큼 애제자였다.

이어 그는 "나는 참 복이 많다"며 "암 투병 중이었던 후배가 원불교문화발전을 염원한다고 20억 상당의 아파트를 희사해 용원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총부 일요법회에서 피아노에 맞춰 성가 부르는 것이 왠지 흡족하지 않아 오케스트라를 염원했었다. 그런데 심원향 선생이 소원을 이뤄줬다. 또 연주해주는 원광정보예고학생들 장학금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는데 이뤄진 것이다. 용원문화재단이 발족되어 할 수 있었다. 이 일 또한 너무나 감사하다"고 당시 절실했던 마음을 내 보였다.

제자들이 전국 교당에서 합창단을 조직해 활동해 주기를 염원하는 그는 "어린이 성가대를 단계적으로 키우는 등 교당이 지역사회 문화의 장으로 활짝 열렸으면 좋겠다"며 "교단이 젊어지려면 변화를 해야한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최근 몇 교당에서 하우스콘서트가 진행되고 있고, 교당마다 하면 좋겠다는 응원도 잊지 않았다.
1988년 호암아트홀과 1999년 KBS홀에서 열린 '삼소음악회'의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교단에 문화가 활성화 될 때 교화도 활기를 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중앙총부에도 제대로 된 문화회관이 있어야 한다. 전시회와 공연을 아우를 수 있는 문회회관이 100주년에는 꼭 마련됐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밝히기도 했다.

문화는 흥이요, 열정이다. 흥과 열정이 날 때 교화도 배가된다는 것이다. 문화를 이야기 할 때면 그의 목소리에서는 병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힘과 긍정의 에너지가 올라옴을 느꼈다. 감사와 긍정의 힘이 커서일까. 최근 암세포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온다.

평생 작곡한 400여 작품, 그의 숨결이자 손길로 오늘날 행사 때마다 연주되어 만 생령의 가슴을 훈훈하게 적셔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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