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성 도무·원경고등학교
(논설위원)
'혁명이 문학적 몽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혁명은 '문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릅니다. 결코 다릅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나고, 문학을 잃어버린 순간 혁명은 죽습니다.'

일본의 탁월한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가 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라는 저자의 말 자체가 매우 혁명적이다. 도대체 읽고 쓰는 문학 행위가 어떻게 혁명일 수 있을까.

그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혁명(대혁명)을 예로 들어 문학이 혁명의 본질임을 증명한다. 당시 교회가 부패할 대로 부패해졌을 때, 루터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가 성서를 읽었다.

루터는 이상할 정도로 성서를 읽고 또 읽는다. 라틴어도 그리스어도 히브리어도 공부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읽는다. 그리고 마침내 당시 부패한 세상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루터는 그렇게 읽고 읽고 또 읽다가, 그 유명한 95개조의 의견서를 쓰고, 예술, 문학, 정치, 법, 신앙, 종교 모든 분야에 글을 써서 127권의 저작을 남긴다. 그래서 예술, 문학, 정치, 법, 신앙, 종교, 그 모든 것이 변한다. 대혁명이 성취된 것이다.

중세와 현대가 다르고, 시대 상황과 사람의 인지 정도가 다르다고는 하나, '문학, 혁명, 루터'에 대한 사유는 세상의 변화가 어디서 오는가를 성찰하게 한다. 혁명을 혁신으로 바꾸어본다. 문학이 과연 세상을 변화시킬까. 읽고 쓰는 행위가 진정 변화와 혁신의 본질인가.

결국 읽고 쓴다는 것은 인지가 밝아진다는 것이다. 공자가 책 묶는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주역을 읽은 것이나, 주자가 눈이 멀도록 경서를 읽고 쓴 것이나, 대종사께서 대각 후에 많은 경전을 읽고 조선불교혁신론을 저술한 것이나, 루터가 성서를 읽고 또 읽으며 127권의 저작을 남긴 것이나, 이는 모두 인지가 밝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본질적 행위로서 같다. 인지가 밝아지면 마침내 혁신이 일어난다.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지 않고서 변화하는 것은 세상에 없다. 발명가 에디슨은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디트로이트 시립도서관의 책을 거의 다 읽었다. 읽고 읽고 또 읽고 나니 그 에너지가 발명으로 터져 나왔다.

에디슨은 세상을 바꾸었다. 그가 바꾼 세상의 본질은 읽고 또 읽은 문학이었다. '은혜의 책보내기운동본부'에서 12년간 장병들에게 보낸 책 100만 권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또 다른 힘이다.

그러므로 혁신은 손쉽게 얻을 수 없다. 인지가 밝은 세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고 몇 가지의 제도 개선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혁신을 부르짖는다고 될 일은 더욱 아니다. 반드시 이러한 본질적 행위의 누적과 시절인연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훨씬 어렵다. 열 사람, 백 사람의 한 걸음은 열 사람, 백 사람의 밝음과 연대로서만 가능해진다. 혁신은 넓고 깊게 멀리 가는 길이다.

지금 교단에서는 교헌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교헌을 개정하고 있다. 100년 교단의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교헌을 시대에 맞게 개정하여 미래를 열어나가는 일은 참으로 당연하고 소중한 작업이다. 그러나 교헌 개정이 도리어 교단 혁신에 종지부를 찍어서는 안 된다.

'집단 지혜'가 어우러지는 '밝음'으로 교헌 개정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교헌 개정은 완료형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교단 혁신의 필요조건이라는 인식으로 접근하였으면 좋겠다.

이제 계사년 세밑이다. 가파르게 달려온 한 해를 접고 나의 혁신을 돌아본다. 넓고 깊게 멀리 가기 위하여 다시 마음을 추스른다. 읽고 또 읽자고. 100만 권의 책 속으로 뛰어들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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