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 그리움의 연원 되기를

▲ 겨울나무 사이로 꽃무릇 진초록 잎들이 한 겨울을 나고 있다.
굽이굽이 뻗은 77번 도로, 3년 전 이 길을 향했던 기억이 있다. 백제불교의 산실 불갑사, 인도 공주의 사랑이 담긴 참식나무 숲, 기독교인의 피가 뿌려진 순교지, 그렇게 천년 역사의 흔적 속에 자리한 원불교 영산성지 노루목 대각터 까지. '길에서 길을 묻다' 그 첫 번째 여정지가 전남 영광이었다. 그리고 늦은 밤 도착해 하루 밤 묵어갔던 산사가 불갑사였다.

'모든 경전의 의지(義旨)가 대개 적절하여 별로 버릴 바가 없으나 그 중에도 진리의 심천(深淺), 시대에 적부적(適不適)이 있구나.' 소태산대종사의 꿈속에 보여졌던 절, 불갑사는 대종사가 일산 이재철 선진을 통해 금강경을 구해 보셨던 곳이다. 교단사적 의미가 전해지고 있는 불갑사를 오롯하게 걸어보고 싶었다.

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 꽃무릇

일생동안 잎과 마주하지 못하는 꽃이 있다. '꽃무릇'이다. 한 몸 한 뿌리에 났지만 꽃과 잎이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설움을 안고 있다. 잎은 꽃을, 꽃은 잎을 서로 그리워한다는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다. 그래서 상사화(相思花)라고도 한다. 불갑사 일주문에서 해불암까지 약 3만평의 꽃무릇 군락지가 형성돼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이다.

유독 절집에 꽃무릇이 많다. 뿌리의 독성 때문에 절집을 단장하는 단청이나 탱화에 뿌리를 찧어 바르면 좀이 슬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사찰 부근에 많이 심어진 이유다. 그러나 애틋한 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절집을 찾은 아리따운 처녀에 반한 젊은 스님이 짝사랑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 피를 토하고 죽은 자리에 피어난 꽃이라는 이야기다. 출가한 스님을 그리던 처녀의 혼이 붉게 타오른 것이란 전설도 있다.

겨울 산사, 앙상한 겨울나무 사이로 꽃무릇 진초록 잎이 너무도 선명했다. 꽃이 떨어진 다음 잎이 나오는 안타까운 꽃, 그래서일까 한 겨울을 나고 있는 그 진초록 빛이 처연하기까지 했다. '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 바라보는 이해인 수녀의 애틋한 마음이 그의 시에 담긴다. '기다림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를/ 기다려보지 못한 이들은 잘 모릅니다/ 좋아하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 어긋나보지 않은 이들은 잘 모릅니다/날마다 그리움으로 길어진 꽃술/ 내 분홍빛 애틋한 사랑은/ 언제까지 홀로여야 할까요.'
▲ 불갑사 대웅전.
초전가람지 불갑사

불갑사는 백제 침류왕 때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법성포로 들어와 처음 세운 절이다. 가람의 경내로 들어서는 사천왕문, 사방에서 불법과 가람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의 위세가 당당하다. 걷는 걸음걸음 천천히 호흡을 싣는다.

불갑사의 또 다른 특징은 대웅전 안의 삼신불에 있다. 대웅전(보물 제830호)은 서향인데 대웅전 부처는 남쪽으로 돌아앉아 있다. 부처의 옆모습이 보이는 특이한 구조다.

대웅전 측면 분합문 금강저살문. 볍씨모양의 육각테두리를 하고 그 안에 연꽃과 국화, 보리수 문양의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불법과 보살, 불자들을 지켜주는 무기가 금강저임을 상기하면 꽃문은 그대로 호법문이 된다. 절제와 강건함이 느껴진다.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법고 소리가 산내에 가득 채워지면, 땅위의 짐승도, 허공을 나는 새도, 물에 사는 고기도,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까지, 무명(無明)의 잠에 빠져 있는 중생계의 모든 중생들이 빠짐없이 깨어날 것이다.

불갑사에는 참식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인도 공주가 이별의 선물로 준 나무 열매 씨앗이 절 뒤편 군락(천연기념물 제112호)을 이뤘다. 대웅전 우측, 각진국사비 바로 옆에 서 있는 참식나무 한 그루, 매서운 겨울 추위를 더한 그리움으로 견뎌내고 있다.

'소태산대종사는 사월초파일 전날 새벽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어느 절로 갔다. 처음 가보는 절이었으나 산수경치며 절 모습이 결코 낯설지 않았다. 옛 집을 찾아온 것 같은 편안한 마음으로 절 구경을 하다가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소태산대종사를 보더니 큰 절을 올리며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후천개벽 시대의 주세불께서 천만 방편으로 천하 만민을 널리 제도하려면 이 경전이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노인이 보여준 경전은 〈금강경〉이었다.' 〈소태산대종사 생애 60가지 이야기 발췌〉

소태산대종사의 말씀으로 불교와의 기연을 떠올렸다. "내가 스승의 지도 없이 도를 얻었으나 발심한 동기로부터 도 얻은 경로를 돌아본다면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 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淵源)을 부처님에게 정하노라, 장차 회상을 열 때에도 불법으로 주체삼아 완전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

'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도 서로에게 그리움의 연원이 되기를. 그렇게 상생의 기연이 되기를. 한 생각 마음에 담고 산내 암자 수도암으로 향했다.
▲ 참식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산사 뒷편 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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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를

기다려보지 못한 이들은

잘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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