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기 상쾌한 바람같이

억겁에 만나기 어려운 대도회상을 만난 기쁨으로 일관한 일생. 대종사의 교법은 불보살이 될 수 있는 무상대도라는 믿음으로 정진 적공한 선산 이선우(善山 李善友, 1921~2012) 대봉도.

그는 17세 되던 원기21년, 어머니의 인도로 신흥교당 예회에 참석한 것이 인연이 되어 간사근무를 시작했다. 형산 김홍철 종사의 지도로 주경야독하며 배움의 갈망을 풀어갔다. 원기25년 대종사를 뵙고 곧바로 산업부원이 됐다. 이런 연유인지 일생을 주로 산업기관에 봉직하면서도 고된 일이 적공인양 살았다. 이런 중에도 진리연마에 대한 목마름으로 한학에 대한 배움의 열정은 남달랐다.

시절 인연이 좋아서 우리 회상의 한문의 대가인 원산 서대원·호산 이군일·유산 유허일 선진의 지도는 〈불조요경〉을 통한 교리연마의 시금석이 됐다. 그래서인지 〈불조요경〉에 우리 교법을 접목시켜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퇴임 직전까지 원림농원에서 복숭아 농사를 지으며 예비교무들에게 지도하는 명쾌한 교리해석과 고경강론은 후진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또한 만나는 후진들에게 "우리 일원회상을 만난 것은 둘도 없는 홍복으로 일원회상의 참 주인들이 되도록 자신성업봉찬에 매진하라"며 공부심을 일깨웠다.

유일학림 1기생으로 졸업 후, 원기34년 이흥과원을 시작으로 원기39년 영산성지, 수계농원, 이리보화당, 원광대학교, 중앙훈련원, 영모묘원, 원림농원 등에서 봉직했다.

영산으로 갈 때는 6·25직후라서 쑥대밭이 되다시피 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정산종사는 "난리 뒤라 영산이 어수선할 것이다. 고생이 되더라도 화합하되 휩쓸리지 말고, 과불급이 없이 중정을 행하며 순공심으로, 천심으로 살라"는 법문을 내렸다. 그는 형산종사를 도와 영산성지 재건의 기초를 세우고, 이어 벌어진 2차 방언을 조력했다.

특히 퇴임을 앞둔 말년에 임한 원림농원은 육영사업과 공익사업을 위한 곳이었다. 당시 과수농업은 사양길이었다. 헐값에 팔리는 도매시장보다 한 푼이라도 공익사업에 보태기위해 직접 손수레를 끌고 소매를 하는 일도 불사하는 공심가였다.

그는 대종사를 친견한 제자로 '게송' '교리도'등 중대법문을 직접 받들고 교법이 완성되어 가는 역사의 현장에 함께한 자부심으로 살았다. 때문에 광대무량한 낙원세계를 무위이화로 열어가는 주세성자의 위력을 사무치게 느끼면서 늘 충만한 기쁨과 신성으로 살다간 일생이었다.

교단의 가장 낮은 곳에서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일원대도 회상 만난 기쁨과 보람으로 영육쌍전 이사병행의 교법실천을 노력하며 살았다. 이런 그의 진면목은 원로원에서 더 빛이 났다.

노구에서 솟아나는 교단에 대한 양양한 희망과, 법열로 충만한 수도생활은 마치 달관한 신선처럼 한줄기 상쾌한 바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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