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 忿 疑 誠 3

믿음에 기초하여 신앙에 발을 디딘 후에는 그 믿음의 내용(교리)을 명확히 해결코자 하는 분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분발해야 할 때에 이를 어렵다고 포기하거나 또는 아주 쉽다고 지나쳐 버리면 믿음에 기초를 둔 그 뿌리가 흔들릴 수도 있다.

그래서 만약 분발해야 할 때를 놓친 나머지 법을 들을 때마다 으레하는 소리일 뿐이며 법을 별 것이 아니라는 태도로 이를 지나쳐 버린다면 이는 관문상(慣聞想 의레듣는 말이라는 생각)에 빠졌다 하여 자존자대(自尊自大)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또 법을 듣는데 아무리 들어도 도저히 알 수 없다하여 까마득한 생각을 지닌다면 이는 현애상(懸崖想 저 높은 언덕 위에 있는 것을 도저히 만질 수 없다는 생각)에 빠졌다 하여 이는 자포자기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법을 듣는 태도는 자포자기도 바람직한 것이 아니요, 또한 자존자대도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자포자기에 빠졌다면 모처럼 얻은 부처님의 법을 보물로 여기지 않는 경솔함에 따라 귀중한 깨달음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다.

또 법을 듣고 보니 언제나 그 말이 그 말일 뿐 별다른 것이 아니라 하여 자존자대에 빠졌다면 다만 말만을 들었을 뿐 그 말을 실천에 보지도 않은 채 관념으로 만 법을 이해한 것이라, 참으로 그 중에 숨겨진 보물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법이 무엇인가?"하는 백낙천의 물음에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뭇 선을 행하며 제 스스로 그 뜻을 맑히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는 답변, '별스런 뜻이 아니군'하는 태도에 "세 살 어린 아이도 알기는 쉬어도 팔십노인도 행하기는 어렵다"는 조과선사의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딴에 제자백가 오거서를 다 통톡하고 동서고금의 희귀 서적을 정독했다 할지라도 촌천살인(寸鐵殺人 아주 짧은 송곳으로 사람을 찔러 죽일 수 있다는 말)의 한 두 마디 말을 얻어 그 속을 활연히 깨어 버린 나머지 더 이상 의심할 바가 없는 활연관통의 경지를 얻어야 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공부가 익어갈 무렵에 던져 주는 것이 바로 '의두(疑頭)'요 '간화(看話)'이니 풀어야 할 의두는 대략 1700여 공안이지만 이를 간추려 제시한 것이 정전에 등장한 의두요목(疑頭要目)인 것이며 이 의두를 풀어보는 진정한 태도를 일러 '간화'라고 한 것이다.

즉 법을 듣는 두 태도에서 자포자기나 자존자대를 그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은 법을 들은 것으로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과연 그러한 것인가를 꼼꼼히 새겨 철저한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 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물론 역대 조사들이 마음속에 의심을 품지 않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심을 키울대로 크게 키워 의심의 덩어리를 가진 뒤에 이를 언뜻 깨우칠 수 있는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태도가 꼭 필요하다.

<문역연구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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