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산 김대거 종사 진영.
대산 김대거 종사의 생애를 12회에 걸쳐 사진과 함께 연재하고자 한다. 본고는 원기98년 원불교출판사에서 필자가 펴낸 〈대산 김대거 종사〉의 내용을 중심으로 엮어나감을 밝힌다.

1. 좌포에서 탄생하다

1) 기도정성으로 태어나다

'평화는 오리, 평화는 오리'라고 평화를 염원했던 평화의 성자 대산 김대거종사(大山 金大擧宗師)는 평생 소자(小子) 소제(小弟) 소동(小童)을 자처하며 원불교 종법사(宗法師)로 33년간 재위하며 교단의 기초를 닦았다.

대산 김대거종사(이하 대산종사)는 1914년 4월 11일, 전라북도 진안군 만덕산 아래 성수면 좌포리에서 연산 김인오 대희사와 봉타원 안경신 대희사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영호(榮灝)이다.

대산종사가 태어난 좌포리는 마을 좌우로 봉황이 살았다 하여 붙여진 봉황산과 봉황이 알을 품었다는 난산(卵山, 알미산)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져 봄에는 꽃동산이 되고, 가을이면 단풍이 병풍을 두르고 앞으로 맑은 시냇물이 유유히 흐르는 평화로운 산촌이다.

대산종사의 증조부 김봉배가 경상도 거창군수를 하다가 '그곳에 오래 있으면 자손을 못 보겠다'는 말을 듣고 지관과 명당을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좌포마을 뒷산 봉황산에 올라 터를 잡아 정착했다.

천석꾼 집안으로 해마다 소작농들에게 도조(賭租)를 받는 시기가 오면 대산종사 조부 김용성은 벼 속에 티끌이 들어있어도 가마니 수만 세어 대강 거두어 들였다.

대산종사의 부모가 결혼하여 8년 만에 큰딸을 낳았다. 그 후 양가 조부모와 전 가족이 아들을 얻기 위한 기도를 올렸다.

안경신이 꿈을 꾸었다. 마을 뒤에 있는 알미산이 거꾸로 보이고 앞에 흐르는 시냇물이 돌연 큰 바다를 이루어 중천에 떠있는 둥근달이 강물로 떨어지더니 집안으로 밝은 빛이 가득 번졌다.

그 순간 찬란한 빛을 흠뻑 마시고 달을 치마폭으로 세 번이나 품어 안았다. 안경신은 꿈을 꾼 후 부정한 장소에 가지 않고 삼복 더위에도 냉수를 마시지 않으면서 태교에 정성을 다해 첫딸을 낳은 지 2년 만에 대산종사를 낳았다.

2) 불연 깊은 집안에서 자라다

대산종사의 증조부는 불경을 많이 구입하여 가보(家寶)로 여기며 독송하였고, 증조모는 별당을 지어 주야로 불경을 독송했다. 조모는 불경을 독송하며 생불님 만나기를 염원했다. 대산종사는 이처럼 불연(佛緣)이 깊은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산종사는 어려서 체구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작았지만 담력이 컸다. 어느 날은 집안에서 일하는 머슴이 어린 대산 종사를 놀려 주려고 칠흑 같은 밤중에 묘가 있는 산으로 업고 올라가 내려놓고 숨어버렸다. 대산 종사는 겁이 나고 무서웠지만 두 주먹을 꼭 쥐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내려왔다. 평소에는 또래 아이들 보다 연상의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으며 놀이에서도 언제나 선두에 서서 지휘했다.

7세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서당에 점심을 싸가지고 가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서당에 다니면서도 학문에는심취하지 못했다.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인한 어려움과 혼란을 보며 '세상이 평화로웠으면 하는 생각' 뿐이었다. 그래서 세계지도를 구해 나름대로 평화로운 세상을 구상해 보곤 했다. 대산종사의 당숙은 중국에서, 종형은 일본에서 유학하고 신학문을 받아들여 집안이 일찍 개화(開化)됐다.

대산종사는 11세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성수면 학술강습소(學術講習所)에 입학했으나 뜻에 맞지 않아 3개월 정도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 뒷산 봉황대에서 본 좌포 전경.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