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 忿 疑 誠 4

말은 그 머리를 풀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머리를 풀 수 없는 것은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여 큰 의심으로 뭉치지 않기 때문에 또한 그런 의심이 걸어지지 않는 수가 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표면만을 보고 생각하지 말고 안으로 숨겨진 진실을 깨닫기 위해 눈 위에 손을 얹어 자세히 보라고 당부한 것이며 나아가 진실은 속에 든 것이니 이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일단 어째서 그런가를 잘 살피라 했다.

즉 <천자문>에서도 가장 말미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그런가를 묻고, 다음에 아! 그렇구나 하여 감탄하고, 일단 감탄을 했다면 과연 너도 그렇게 여기는가 하고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할 수 있으면 있는대로 구한 나머지, 최후로 이것이 확인이 되었을 때 과연 그렇다고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焉哉乎也)"라고 했다.

만약 어째서 그런가를 묻지 않고 만다면 진실을 얻을 수 없는 일이며, 나아가 '그렇다' 라고 감탄하거나 쉽사리 긍정만 한다면 이 또한 조그마한 진실에 빠져 버리는 위험에 처해 있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다만 '너도 그렇느냐?' 며 동의를 구하는 물음을 던지고 나서야 과연 그렇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큰 깨달음은 의심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이 의심이 여러 가지 확인을 거쳐 더 이상 틀림없는 것에 이를 때까지 반복해 의심해 나아가 '너도 그렇게 여기는가?'라는 동의를 구하는 반문에 따라 마침내 옳은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

의심하다는 뜻을 가진 의심할'의(疑)' 는 본디 화살이 어디를 향해 나가야 할 바를 알지 못하여 발을 땅에 딛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모양을 그대로 본 뜬 글자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은 곧 깨달음을 얻는 하나의 좋은 방법인 것이다.

역대 큰 깨달음은 바로 의심에서 얻어진 것이니 만약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원리를 그냥 예사롭게 넘겨 버렸다면 어찌 만유인력의 법칙을 유추해 냈겠는가? 의심은 곧 큰 깨달음을 얻어 내는 깨달음의 어머니와 같은 것이다.

또 사물에 갊아 있는 진실은 겉의 표면에 나타나 있지 않고 거의 다 깊은 속에 갊아 있기 때문에 내부를 파고드는 깊은 의심이 없다면 깨달음이란 것도 있을 수 없다.

깨닫다는 말이나 알다는 말은 내부를 깊숙이 파고 든 나머지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을 이미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알'은 반드시 껍데기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속에 깊숙이 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껍질을 벗겨내야 만이 그 속에 든 알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깨닫다는 말은 되새겨 보면 껍질을 깨어 버리고 속에 든 알을 건져 낸다는 말이다. 그래서 '알다'는 뜻도 다른 게 아니라, 비로소 속에 깊이 숨겨진 '알'을 찾았다는 말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큰 의심 밑에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大疑之下, 必有大覺)'고 말한 것이다.

<문역연구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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