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유의 눈빛과 미소로 객석 휘어잡은 명무(名舞)

▲ 임이조 명무가 만덕산훈련원 후박나무축제에서 공연을 했다.

"달도 차면(滿月) 기우나니, 모든 것도 아쉬울 때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편안하게 마음을 비울 줄 알아야 한다." 고 임이조(63·법호 융산, 법명 용원) 명무가 아내에게 늘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때론 부족한 듯해야 깊은 여운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30일 오후 폐렴으로 열반에 든 그는 63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좌산상사는 그의 열반 소식을 듣고 "뜻밖의 소식에 슬픔을 금치 못하며 아쉬운 마음이 그지없다. 이제 무용예술의 절정에서 그 기량을 교단과 국가와 세계에 펼쳐 나아가야 할 시기에 어찌 그리 쉽게 떠났느냐"며 애통함을 표했다.

그는 2013년 10월16일 저녁 감기로 입원하기 전 까지도 제자들에게 열정적 강의를 할 정도였다. 아내 권소원 교도(강남교당)는 "입원 3일 만에 중환자실로 옮겨져 투병생활을 하다가 한 달 만에 열반을 했다"며 "해외공연의 피로가 누적되어 면역력이 떨어진 상황이라 회복이 어려웠다"고 안타까운 상황을 설명했다.

1월3일 오후7시30분 강남교당에서 진행된 임이조 명무의 5재 천도식에 참석했다. 천도재를 마친 후 가족들과 제자들에게 고인의 예술인생을 인터뷰했다.

지극한 한국전통춤 사랑

사단법인 한국전통춤연구회 및 임이조춤보존회 권영심 부이사장은 "선생님은 누군가로부터 공연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특히 외국의 경우는 더했다. 국내에서는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만 해외에서는 내가 안가면 이 사람들이 언제 전통무용을 구경하겠느냐"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임을 밝혔다.

이어 그는 "뉴욕 공연을 마치고 귀국 후 바로 필리핀 공연을 갔다. 그곳에 갈 때면 늘 보시하는 마음을 갖고 늘 임했다. 위문공연을 자처한 것이다"며 "해외에 나갈 때면 제자들 여럿이 와서 배우는 것 보다는 나 혼자 가면 경비도 아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임했다"고 말했다. 한국전통춤연구회는 뉴욕지부와 일본 동경, 오사카지부가 있다. 미국을 방문할 때면 뉴욕문화원에서 한국 무용 특강과 각종 교민들을 위한 공연 등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온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이번 미국방문에서 감기가 걸렸다. 이후 일본과 필리핀 일정 등이 무리가 됐다. 또 한국 공연도 일일이 다 소화했다. 결국 에너지가 고갈된 상황이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설명했다.

지난해 10월 세종문화회관에서 '태백, 아라리요' 공연을 올리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한 그는 "마지막 작품이 됐다"며 "아마추어 35명을 3개월 동안 지도했다. 선생님은 춤을 지도할 땐 온 정성을 다했다. 정성 들인 만큼 무대에서 표가 나기 때문이다"는 전문가의 세계를 말했다.

이어 그는 "선생님은 무릎 연골이 다 닳았다 '내 연골이 다 닳으니 저들 눈에 내 춤이 보이는가 보다. 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춤을 추는데 어찌 내가 입을 닫고 있겠느냐. 배우는 입장에서는 똑 같은 말 100번 하면 한 번 알아듣는다. 그러니 200번 300번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며 스승의 열정을 전했다. 제자들에게 늘 정성을 다해준 스승으로 이제는 영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그리움의 대상이 된 것이다. 1월18~19일 교방살이춤 연수와 25~26일 한량무 연수 때에도 선생님의 영상과 함께 할 예정이다.

구도하듯 춤을 추다

임이조 명무는 중요무형문화재 승무 전수조교이자 살풀이 이수자이다. 인간문화재 이매방(86)선생의 적자로 올 봄에는 무형문화재 지정을 앞두고 있었다.

고인의 춤사위에 대해 '여자 보다 더 여성스런 몸짓'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는 승무와 살풀이춤 외에도 한량무, 교방살풀이춤, 화선무 등 독무(獨舞)에도 능했다.

그는 "선생님의 정서는 도가적인 면도 다분했다. 춤을 추면서 구도를 하는 심경으로 임했다. 제자들에게도 늘 정성을 다하라고 강조했다"며 "선생님은 손끝에서 발끝, 눈빛하나까지도 안무했을 정도로 작품에 몰입했다. 또 굉장히 순수했다. 제자로서 냉철하게 생각을 해 봐도 선생님에게는 '정성'이라는 단어로 밖에 대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동작은 절제돼 있어 겪을 갖췄지만 특유의 눈빛과 미소로 객석을 휘어잡은 명무(名舞)였다는 것이다.

고인은 제자들에게도 "직접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내 춤을 배우고자 하거든 촬영과 녹음 등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대로 공부하라"고 오픈을 했을 정도이다. 일반적으로 무용가들은 자기 춤을 공개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고인은 제자들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보이고 내 놓았다.

그는 "제자들이 선생님을 느끼고 싶어 한다. 그래서 최근 연구실을 자주 찾는다"며 "연구실에는 선생님의 소지품이 그대로 있다. 잠시 해외공연을 가신 듯하다. '좀 더 긴 출장을 가셨구나' 생각될 뿐 아직도 열반한 것 같지 않다"고 심경을 밝혔다. 가족들 역시 영정사진이 마치 공연 리플렛에 나오는 사진으로 느껴진다고. 어느날 출장을 마치고 돌아올 것이다는 그리움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개벽의 북소리 등 많은 유작

고인의 대표적인 예술작품에 대해 그는 "교도로 교단 창립 제2대말을 기념해 '개벽의 북소리' 전국 순회공연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근래에는 '백조의 호수'다. 버선신은 백조로 한국 춤사위로 쉽게 풀어 옷감 휘날리는 자연스러운 모습까지도 춤 속에 묻어나게 했다. 버선 신고 폴짝 폴짝 날아다니는 느낌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고 관객들이 평했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뉴욕시티센터 개관 공연, 고인의 인생을 전통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낸 '한이 깊으니 흥도 깊더라'는 기원무적인 공연, 어머니로부터 들은 태몽을 표현한 '호랑나비의 혼', '월인천강' 등이 모두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다.

그는 "올해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니르바나'라는 공연을 계획했었다. 대관 일을 조정 중에 열반한 것이다"며 "직접 대본을 쓰고 안무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선생님은 마치 계획하셨던 것처럼 체계적으로 자연스럽게 춤으로 인생을 정리하셨다"고 밝혔다. 고인은 2012년 만덕산훈련원 하선에서 선무를 시연하기도 했다. 부인인 권 교도는 "아버지가 완성하지 못한 선무를 현지(23)와 현종(22)이가 완성시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고인은 원불교100년에 공연으로 보은의 도리를 다하겠다던 꿈을 여러 차례 내비췄다. 특히 신앙무용과 선무용 창작에 큰 희망을 보여줬다. 그 꿈을 펼치지 못한 아쉬움이 가득하다.

종재는 17일 오후3시 강남교당 대각전에서 열린다. 제자들의 추모공연도 펼쳐진다.


임이조 교도 주요 약력

1950. 4. 대전출생(본명 규홍)
1978. 임이조무용단 창단(2006 임이조 선무용단 개칭)
1985. 사단법인 한국전통춤연구회 이사장
1992. 7.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수교육 조교
1999. 2.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무형문화재학과 수료
1999~2003. 남원시립국악단 예술총감독
2007~2012. 서울시무용단 단장 역임

- 수상

1981. 전주대사습 무용부 장원(문화공보부장관상)
1998. 진주개천예술제 대상(대통령상)
2000. 예총예술문화상 국악부문 대상
2006. 화관 문화훈장 서훈
2011. KBS 국악대상 수상
2012. 제26회 예총예술문화상 무용부문 대상
2013. 12. KBS 국악한마당 특별 공로상 수상

- 주요공연 및 안무 작품

1998. 한국 전통춤의 기본무 정립 및 전통 창작무로써 임이조류의 한량무,
         교방살풀이춤, 화선무, 하늘과 땅, 태평성대.
2001. 3. 방북공연 '춘향 평양에 가다'
2004. 10. 한국전통춤연구회 '춤인생 50년 월인천강'
2006. 9. Fall for Dance Festival 개막공연 '하늘과 땅'
2007~2012. 9. 서울시무용단장으로 경성1930, 바리, 만월,
                      백조의 호수, 사미인곡, 오페라-'연서, 황진이'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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