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까지 가야 좋은 그릇이 나올 수 있습니다"

▲ 도예가 김형규 씨.

예로부터 명당터로 알려진 구황산(九皇山). 아홉 황제를 내게 된다는 전설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도예가인 희뫼 김형규(47) 씨는 호남정맥에서 분기한 영산기맥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구황산을 뒤로 하고 전남 장성군 삼계면 청림마을에 터를 잡은 것도 나름의 뜻이 있었다.

백우헌에서 만난 그는 "축령산에서 한평 반짜리 집을 짓고 4년 정도 도자기를 빚었다. 그러다 여기와서 터를 잡은 것은 꿈에서 계속 예시했기 때문이다. 트럭을 타고 마을 산모퉁이 동구 밖 소나무에서 이 터를 보는데 가슴이 뛰었다. 날이 어두워 다음날 아침에 가시덤불을 헤치고 이곳에 오니 여러 가지 기운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는 주변을 살펴보면서 감탄했다. 산 지형과 계곡물의 흐름은 물론 흙을 정제할 수 있는 수비장 위치와 작업실을 마음속으로 그렸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땅과 흡사했다. 그렇다고 쉽게 구입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 땅의 소유주가 절에 다니던 부부 교사였다. 스님에게 불사를 하려고 이 땅을 가지고 있었다. 스님에게 전화해서 '이 생에만 이 땅을 빌려서 쓰려고 합니다'말하니 그러라 했다. 이후 부부교사의 땅을 구입하고 나서 땅을 팠는데 꿈 속에서 본 반석이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바로 터를 고르고 가마를 지었다. 제대로 된 터를 잡았다는 것이다. 차례로 살림집인 백우헌과 백자를 진열할 빙의당을 건축했다. 이것은 그가 축령산에서 도자기를 빚을 때와는 격세지감이다. 작품활동과 제자를 양성할 수 없는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이내 가마에 불 때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거듭 역설했다.

그는 "이틀반 정도 잠을 자지 않고 불을 때야 한다. 50시간이다. 그릇을 출산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그 과정은 명상상태다. 나무를 집어넣고 가마를 달래고 하다보면 가마가 웃는다. 그 미소에 반해 그릇을 계속 만드는 것이다. 가마와 사랑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강조했다.

달항아리와
창작 작품에 정성
유유자적한 심경으로
그릇 빚어


그는 이 과정을 마라톤 주자가 '완주했을 때의 기쁨'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불 때는 과정이 즐겁단다.

그러나 여성들을 봉토 위에 올리면 그릇이 익지 않을 때가 있다. 가마 자체가 여성성을 가지고 있다는 설과 관련이 있다.

그는 "실제로 불을 때다 보면 그런 경험을 한다. 나흘을 때도 그릇이 안 익을 때가 있다. 지쳐 포기하고 그대로 놓아 둔 상태에서 또 불을 때면 그릇이 익는다. 사기장들이 이를 조심스러워했다. 가마신을 달래는 의식을 한 후 불을 땠다"고 설명했다.

어느 정도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그는 도공들의 애환을 이야기 했다. 도공들이 흙을 밟고 가마에 나무를 넣고 불을 때면 시력까지 소진하게 된다는 것이다. 40이 넘으면 잘 받아주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역시도 5∼6년 전보다 힘이 많이 든다고 했다.

그는 "가장 신성한 직업은 남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농사짓는 일, 옷 짓는 일, 집 짓는일, 독 짓는 일이다. 이런 짓는 행위를 하려면 질을 잘해야 한다. 힘든 것에는 질이라는 글자가 붙었다. 가령 수비질, 물레질, 삽질, 낫질, 바느질이다. 이제는 작업 시간을 따로 두고 하지 않는다. 자다가 일어나서 작업을 하기도 한다. 가능하면 가마 주변에서 놀려고 한다"며 의지를 내비쳤다.

이 속에는 그의 철학이 어려 있다. 도자기는 3대까지 해야 가마 속에서 좋은 그릇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당대에 이뤄질 수 없는 작업임을 알 수 있다.

▲ 달항아리 작품.

그는 "그릇을 빚은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버렸다. 일할수 있는 시간이 30년이라면 일년에 두 번 불을 지피므로 60번이면 끝난다. 여성들은 김장을 서른번 담그면 되는 세월이다. 그러므로 3대를 거치는 동안 불은 500번 정도 때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이력을 듣다 보니 충분히 수긍이 갔다. 그가 도자기와 인연을 맺은 것은 숙명처럼 보였다. 21세때 친구들과 외설악에 갔다가 발을 헛디뎌 20미터 아래로 추락했으나 다행히 절벽에 있던 소나무에 걸려 목숨을 건진 적이 있었다. 삶의 방향도 달라졌다.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감사했다. 모든 것이 예쁘게 보였다. 그러다 사찰에서 운영하는 가마터에서 도자기를 배웠다.

광주로 거주지를 옮긴 후 장애인 자활기관에서 도자기 강사로 활동을 했다. 뇌성마비와 소아마비 아이들에게 도자기를 지도했다. 이후 유생이었던 조부가 건립해놓은 백산마을 정자 주변에 작업실을 짓고 무리하게 도자기 작업을 하다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지인의 소개로 들어간 축령산에서 생활하다 튼실한 도자기 요장을 만들 요량으로 4년전, 현재의 장소에 정착했다.

그는 "2번째 주자가 도자기를 잘 빚을 수 있도록 하는게 첫 번째 주자의 몫이다. 흙 축적은 20∼30년 하고 퍼 쓴 만큼 채워놓으면 된다. 3대가 쓸수 있도록 흙은 야적해 놓은 것도 앞날을 위해서다. 2번째 주자에 이어 3번째 주자는 전 세계에 장성의 백자를 알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백자 작품.

이러한 백자는 그와 밀접한 인과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백토인 고령토를 가지고 놀았고 처음 도자기를 만들었던 백산마을도 그랬다. 축령산 산소골의 소(素) 역시 '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희뫼요도 그렇게 탄생됐다.

그는 "희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뜻이 있겠으나 히말라야 설산을 의미한다. 신성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옆에 흰소가 앉아 있는 곳이 백우헌이다. 이것은 신성한 장소를 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잠시후 달항아리와 도자기 작품 한점씩을 감상하게 했다. 불에서 구워져 나왔지만 그 색깔이 신비로웠다. 그 옆에는 달항아리 소성 과정에서 나타난 등용문도 볼 수 있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감상하기 위해 그를 따라 백자를 전시하고 있는 '빙의당'으로 향했다. 그는 빙의가 얼음처럼 투명하고 차가운 맑음을 뜻한다는 설명을 했다.

빙의당의 분위기가 그랬다. 달항아리가 주류를 이룬 만큼 차가움속에 밝음이 돋보였다. 코발트 색감의 기하학적 문양 접시와 특이한 색감의 달항아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지방마다 민요가 있어 그 그릇을 써 왔고 지방의 특색이 생겨나게 됐다. 그럼에도 그릇은 우리 생활속에서 같이 쓰여 왔다. 사기장들은 그릇을 만들 때 옛날 배웠던 대로 해 왔다. 시대적 요청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그의 작품을 감상 한 후 달 항아리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 텅 빈 속에 묘함이 있음을 알게 됐다. 생각을 비우고 그 비움속에 지혜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근처 두부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일정을 마무리 했다.

▲ 그의 작품세계가 실현되고 있는 용가마.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