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종이 케이스를 조심히 벌려 커다랗고 새까만 둥근판을 꺼낸다. 혹여나 판에 지문이 묻을까 조심조심한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풍기며 음악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긴다. 판에 먼지가 있든 없든 '후' 하고 몇 번이나 분 다음, 턴테이블의 뚜껑을 열고 가운데에 맞춰 조심히 판을 올려 놓는다. 바늘이 올라가고 가볍게 '퉁'하는 소리와 함께 음악이 흘러나온다. 가끔 모닥불이 튀는 듯 들리는 '타다닥' 소리는 정겹다 못해 따뜻하다. 디지털 음악이 주지 못하는 따스함과 풍부한 저음이 내 몸을 감싸주는 듯하다.

그저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 틀어놓는 음악이 아닌 오롯이 집중하여 감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음악이 필요할 때 나는 레코드판(LP)을 사용한다. 테이프와 CD를 거쳐 MP3의 등장으로 거의 사라져버린 음악저장매체를 굳이 찾아내어 음악 감상에 사용하고 있다.

처음에는 디지털음악이 주는 심신의 피로감에 대한 대안으로 아날로그 음악을 찾다가 LP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다 이제는 음악뿐 아니라 음악을 감상하기 위한 그 느린 과정이 좋아 즐겨 감상하게 되었다. 레코드판은 크기에 비해 수록된 음악의 수는 적은편이어서 30분쯤 감상한 후에는 앞면의 모든 트랙이 끝나 판을 뒤집어 주어야 한다.

이렇게 LP로 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조그만 기기에 수십곡, 수백곡을 담아 하루 종일이라도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현대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굉장히 비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작은 불편함이 주는 소소한 만족감과 즐거움이 있다. 나의 경우 음악에 조금 더 집중하게 되고, 음악을 조금 더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다. 이렇게 느린 것이 주는 여유로움과 마음의 풍요가 그리운 요즘이다. 빠르고 편리한 것들이 생겨나면서 사람들은 더 여유로워졌을까를 생각해보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생활 속에서 몇 가지 예를 찾아보자.

요즘은 거의 모든 가정에서 진공청소기를 사용한다. 청소기를 사용하면 빗자루를 사용할 때 보다 빠르게 청소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청소기를 사용할 때 더 빨리 해야지 하는 마음이 든다. '웅' 하는 기계음이 그런 마음을 부추기는 것 같기도 하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자동차를 이용하면 걸어가는 것 보다 훨씬 빨리 갈 수 있지만 마음은 더 빨리 가고 싶어 하고 있다. 걸어가면서 느끼는 기분 좋은 느낌과 사색할 수 있는 여유 그리고 예기치 못한 우연한 만남은 자동차를 타고 갈 때는 얻기 힘들다.

빠름을 강조하는 세상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한다. 물론 결과도 중요하지만 여러 일들이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았을 때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배우는 것, 나 자신과 직면하는 것 등은 과정 속에 모두 들어있기 때문이다. 과정을 중시하려면 조금은 천천히 느리게 하는 것이 좋다.

경산종법사께서 올해 신년법문으로 '여유·심사·음덕' 세 가지를 설하여 주셨다. 이것을 삼학과 맞대어 보면 여유로운 마음은 정신수양으로, 심사하는 자세는 사리연구로, 음덕을 행하는 것을 작업취사로 되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삼학에서 정신수양이 가장 먼저이듯 여유를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새해가 밝았다. 세파의 빠른 흐름 속에서 조금은 느린 삶으로 삼학공부에 더욱 정진하고 '여유·심사 ·음덕'을 마음에 꼭 지니고 살아가는 원기99년이길 바래본다.<강북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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