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봉공재단 설립 대산종사 경륜

▲ 이순원 교무 / 공익복지부장

대종사 성탑 옆 공터에서 추수를 마친 벼 짚단을 쌓고 있는데 대산종사께서 지나가시게 되었다. 나는 짚벼눌 위에서 인사를 하는데 교학과 학생이었던 김인경교무가 큰 소리로 "용환교우 동생! 빨리와 종법사님께 인사드려" 하는데 나는 자석에 빨려가듯 가서 인사를 올렸다. 대산종사께서는 나를 보시더니 "그놈 참 차분하게 생겼구나"고 하셨다. 이렇게 대산종사를 처음 뵙게 됐다.

학부 때 서원기도를 올리다가 코피를 흘린 적이 있었는데 멈추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병원에 입원했지만 계속 멈추지 않아 의사들도 당황해 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생사까지 위험했었다. 그때 나는 '만약에 살려주신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니 죽은 폭 잡고 저를 온통 다 바치고 살겠다'고 기도를 올렸다. 신기하게도 상태가 조금씩 나아졌다.

그 뒤 대산종사께서 새로 선출된 수위단원들과 봉고하러 영산성지에 오셨을 때 그때의 감상을 대산종사께 말씀드릴 기회가 있었다. 나는 당시 생사의 기로에서 기도 올렸던 상황과 죽은 폭 잡고 구인선진의 사무여한 정신에 접 붙쳐서 대종사님의 포부와 경륜을 실현하는데 정성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올렸다. 대산종사께서는 "그놈 참 영리하구나. 네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순원입니다"고 말씀 올리자 대산종사는 "원자가 무슨 원자냐?"고 되물었다. 둥근 원자라고 말씀드렸더니 대산종사는 두 손으로 원을 그려 보이시며 "네 이름이 이렇게 둥그러서 그런다"며 "됐다, 너는 앞으로 그렇게 된다"고 기뻐하셨다.

그 후 나는 건강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새벽부터 밤까지 일과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 공부를 열심히 했다. 방학이 돼 삼동원에서 대산종사를 찾아뵜다. 대산종사는 "최대의 위축과 최대의 불행이 닥친 후에라야 최대의 신장과 최대의 전진이 있다"며 "만물이 봄 여름에만 크는 것이 아니다. 가을과 겨울에 꾹 억눌렸다가 봄이 되면 저절로 크는 것이다"고 일러주셨다.

이어 대산종사는 "사람들은 경계를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 최고의 역경을 돌려서 전진할 때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고 법문해주셨다. 대산종사께서는 겨울 방학에 뵈면 "내년 여름에는 완도에 있을 테니 완도로 오거라" 하시고 여름에 뵈면 "올 겨울에는 삼동원으로 오거라"고 하시어 방학 때마다 훈증을 받았다. 훈련교무 때 소남훈련원에서 대산종사의 손을 잡고 만불전(萬佛殿)쪽으로 가는데 갑자기 걸음을 멈추시고 "산궁수진 의무로(山窮水盡 疑無路)니 유록황화 양삼가(柳綠黃花 兩三家)라, 산이 다하고 물이 다하여 길이 없어 의심 터니 푸른 버들 누런 꽃 두서너 칸의 집이 있더라.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고 물으셨다.

나는 너무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하여 멍하니 있었다. 이러한 나의 모습을 보시고 옆에 보이는 마을을 가르치시며 "저 마을 이름이 꽃 화에 열 개자 화개리(花開里) 인데 화개(花開)하려면 이 뜻을 알아야 한다. 진리를 대각해야 '화개'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의두를 30년이 넘게 연마하고 있다.

그 뒤에 또 큰 병에 고생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내가 죽지 않고 은혜 속에서 살았던 것은 모두 대산종사의 격려와 호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종사와 정산종사, 대산종사의 성령이 어려 있는 중앙총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거년에는 대산종사의 성해를 내가 영모전에서 성탑까지 모시는 영광이 있었다. 그리고 경산종법사께서 "세계봉공회 설립은 대산종사의 경륜이시니 세계봉공재단을 만들어 대산종사님께 효도하자"고 말씀하셨다. 온몸에 감동의 전율이 느껴졌다.

내가 어떻게 이러한 때에 총부에 와서 이일을 맡게 되었는지 법신불 사은전에 감사 기도를 올린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