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현장에서 봉공

근면하고 검박한 생활표준과 계교심 없는 취사와 원근친소에 끌리지 않는 대인의 심법. 교단 창립의 초석이 된 팔산 김광선 대봉도와 형산 김홍철 종사로 이어진 전무출신의 가풍에 따라 무아봉공의 삶을 살다간 중타원 김대심(重陀圓 金大心, 1926~2011) 대봉도.

원불교와의 지중한 인연은 출가외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17세 되던 원기28년 4월에 응산 이완철 종사의 추천과 보증으로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이후 유일학림 수학을 마친 후 원기34년 서원승인을 받았다.

그는 총부에 오자마자 총부 공양원 생활을 했다. 구인선진의 자손이라 해서 먼저 일은 시키지 않고 공부부터 시킨다는 시비를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무렵 대종사께서는 세탁부에 자주 들려 "법복이 다 됐느냐"고 묻곤 했다. 이럴 때면 '왜 저렇게 채근을 하실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6월1일에 대종사께서 열반을 했다. 이때 일경은 법복을 입은 사람만 상여 뒤를 따르게 했다. 그때서야 대종사께서 왜 그렇게 재촉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원기31년 유일학림이 개원되자 1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는 모두가 궁핍했다. 유일학림 역시 어려움이 많아 존폐위기에 처한 적이 여러 번 있었으나 인재양성의 중요성은 이를 극복해 냈다.

정산종사께서는 "그래도 너희들을 가르쳐야한다. 가르치지 않고 무식꾼을 만들어 어디에 쓰겠냐"며 분발하게 했다. 또한 정산종사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감사와 자부심을 가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졸업한 그는 원기34년에 정읍교당 부교무로 첫 발령을 받았다. 이때 정산종사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교도들을 위로 모시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내가 교무다'하는 상을 가지고 있으면 교화가 안 된다"며 당부했다.

이후 금평·소성·수지·인월·서귀포·화천·무주·삼례·순창·동이리·진안 교당 등 강원도에서 제주도에 이르는 14개 교당에서 수화불피의 정신으로 일원대도를 선양 했다. 45년의 교역생활을 오직 교화현장에서 무아봉공의 정신과 이소성대의 교당운영으로 초창기 궁핍한 현장을 개척했다. 가는 곳마다 어렵고 힘든 곳이 많았지만 교당의 자력을 세우고 교화의 터전을 공고히 했다.

또한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다져진 친화력은 청소년들이 모여들게 했다. 그래서 교화 초기에는 청년들과 함께 문맹퇴치 운동을 하며 지역사회에 일원대도를 선양했다. 이 중 관촌과 소성교당에서는 많은 전무출신을 배출해 후진양성의 공덕탑을 쌓았다.

퇴임 후에도'건강이 허락 하는 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한 사람이라도 깨달음으로 인도해서 낙원생활을 하게 하리라'는 마음으로 법풍을 불리며 말년을 즐거움으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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