陰 陽 相 勝 2

음과 양이 서로 뒤바뀌는 까닭은 무엇인가? 음이 극성하다 보면 양이 되고 양이 극성하다 보면 음으로 바뀌는 것이 자연적인 이치일 따름이다. 그런 까닭에 '음이 극하면 양이 나오고, 양이 극하면 음이 되는 것이다(陰極生陽, 陽極生陰)'라 했다.

즉 극하면 결국 쇠하고, 다시 쇠하다 보면 성해지는 이치도 또한 바꿀 수 없는 어김없는 도리이기 때문에 다 마찬가지로 생사가 뒤 바뀌고 해와 달이 대명하며 선과 악이 뒤 섞이고 길과 흉이 복잡하게 엉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변화는 성쇠와 흥망과 생사와 선악과 길흉의 변화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런 변화를 단지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선악을 초월하여 지극한 선에 머무는 것뿐이라 이를 수 있다. 그리하여 대인의 학문으로 들어가는 최종의 목적은 '지극한 선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다(在止於至善)'고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극한 선이란 선이니 악이니 하는 선악의 차별을 뛰어 넘어 버린 지극한 선을 말하기 때문에 '선악초월왈지선(善惡超越曰至善)'은 곧 '고락초월왈극락(苦樂超越曰極樂)'과도 같은 말이다. 모든 수행의 최종 목표는 '지선'이요 또한 '극락'인 것이다. 모든 수행자들은 이 최종 목표인 '지선'을 위해 선악을 대조하는 유무념 대조공부를 실행함과 동시에 또한 최종목표인 '극락'을 수용하고자 일일시시로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고, 이참사참으로 참회를 반복해 가는 것이다.

일단 최종의 목적을 행해 노력하는 하루하루가 목표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법위등급을 논하고 무시선을 말하며, 정기훈련과 상시훈련을 실시하며, 솔성요론을 음미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모든 수행의 최종 목적은 지극한 선을 찾고 생사가 끊긴 극락 수용에 있는 것이다.

즉 음양상승의 상대적 변화를 벗어난 절대적 가치의 추구가 곧 일원의 위력을 얻도록까지 서원하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도록까지 서원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원의 위력이 무엇인가, 또는 그 체성에 합하도록 하는 일은 어떤 것인가를 근본적으로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한 제자 부처님께 성욕이 과함을 고백하고 나서 그렇기로 "제 남근을 잘라 버려야 할 듯하옵니다" 하자,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아무리 제 남근을 잘라 버린다 할지라도 제 마음을 단속하는 것만 같지 않다"라고 하여 "경계를 없애는 것이 음심을 없애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 '제경(除境)이 불여제심(不如除心)이다' 아무리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고 있는 환경이 설사 자신을 끈질기게 유혹한다 할지라도 제 마음만을 제대로 단속하다 보면 나 밖의 환경은 그리 큰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육창일원(六窓一猿)'이라 했다. 몸 하나에 여섯 창문이 나 있는데 그것은 곧 눈귀코입몸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몸 한 가운데 원숭이 한 마리가 있어 언제나 육창을 드나든다. 간사한 이 원숭이를 때려잡자는 것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진리를 회복하는 길이 아닌가.

<문역연구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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