陰 陽 相 勝 3

음양을 음양이라 하고 양음이라 말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음은 어두운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양은 밝은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양을 표준으로 말하면 양음이라 말할 수 있지만 양은 어두운 곳에서부터 온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즉 일반적으로 말하면 시종일관이라 말하여 시작에서부터 끝까지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더욱 철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나타난 양의 세계는 반드시 어두운 음의 세계로부터 밝아온다는 뜻일 수밖에 없다. 그런 뜻에서 음양이라 하여 음을 앞세우는 것이다.

비근한 예를 들더라도 사람이라는 실체는 어미의 뱃속에서부터 자라 나타난 것이요, 식물도 또한 씨앗이 땅에 묻혀 뿌리를 내린 뒤에야 점차 가느다란 줄기가 목극토의 원리대로 땅속을 벗어나 드디어 땅위로 올라오는 이치와 같다.

이러한 점을 한 해의 변화에서 살펴보자. 한 해의 시작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 질 수 있겠으나 대강의 경우에 양기가 가장 깊숙이 지하로 들어간 동지로부터 한 해를 가늠하게 된다. 이때에는 양기가 가장 깊숙이 들어 있기 때문에 땅을 함부로 밟지도 않고 먼 여행이나 돌아다니는 장사도 삼가며 근신하였다.

양기가 땅속 깊이 든 동지가 점점 자라 올라와 춘분에는 지면으로 나와 밤낮의 길이가 같다가 다시 점점 자라 올라 하지에 이르러서는 하늘로 오를 때로 올랐다가 다시 추분이 되면 지면으로 당했다가 다시 점차 땅속으로 들어 결국 동지가 되고야 만다.

음양의 변화가 이처럼 극명하게 바뀜에 따라 밤낮의 길이 또한 서로가 뒤 바뀌는 것 역시도 극명하다. 그런데 고대 인도에서는 양기가 가장 깊숙할 때와 춘분과의 거리를 4만8천 유순이라 하였고, 또 하지에서 추분과의 거리 또한 4만8천 유순이라 하였다. 그래서 동지에서 하지까지의 거리는 도합 8만4천 유순이라는 숫자가 등장되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광대하고 원만한 법이라는 비유를 8만4천 법문이라 말하게 된 까닭이다. 즉 땅속 깊이든 악을 설득할 수 있고, 하늘 높이 오른 모든 부처들까지도 들을 만한 법문이라는 뜻을 이렇게 비유한 것이다.

실제로 부처님은 어떤 경로를 통해 삼계를 거느리는 대도사가 되었으며 사생을 안심입명 시킬 수 있는 대자부가 되셨을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류의 대도사로 받들어 지게 된 그 이면에는 적어도 오백생을 닦아서 끊임없이 진화하였기에 그렇다는 내력을 적은 〈본생담〉 이야기를 빌면 참으로 긴 여정을 거친 결과라 하였다.

그 마지막 생애로 부처 이전의 생애였던 499번째에는 어떤 일이 있었다고 적혀져 있던가? 즉 499 생애를 살아오며 장차 부처로 태어나기 위한 끝 생애는 깊은 산속 동굴 속에 들어 보림(保任)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때에 가장 악명 높은 앙굴마라(央窟摩羅)가 찾아와 눈을 달라 하자, 그 수행자는 두 말없이 두 눈을 빼 주었다. 그 같은 무상보시의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도솔천에 오를 수 있었다.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문역연구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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