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고 부수기 전에 관심 갖는 일부터

▲ 버려진 혹은 쓸모 없어진 도시의 흉물들을 제거하고 없애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공연 및 영화 상영에 쓰이고 있는 미국 맨해튼의 서쪽 하이라인.
시대의 패러다임은 중요하다.

성장과 개발이 중심이던 시대에서 이제 인간 중심의 시대로 시대적 패러다임은 옮겨가고 있다. 사실 이 말도 곱씹어볼 것이 인간 중심과 성장, 개발 중심은 크게 다르지 않다. 생태계를 함부로 교란시켜가면서도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성장과 개발이었으니. 다만 후자에서 언급되는 인간 중심의 패러다임이란 보다 더 인간적인 세상으로 진일보했다는 뜻일 테고, 인간적이란 말이 품고 있는 저변에는 사람과 생명의 연결이 전제됐을 거라는 맥락에서 동의가 된다. 신촌에서 서대문으로 차를 타고 가는 길목에 아현동이 있다. 아현동은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부터 자주 지나다니곤 했는데, 그곳은 내게 늘 칙칙하고 우울한 인상을 주었다. 왜 그토록 칙칙한 인상을 주었는지를 최근 아현동 고가도로 철거작업 소식을 접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

도로 위로 또 하나의 도로가 굵직굵직한 기둥으로 떠받쳐져 있으니 아현동은 늘 그늘지고 어두컴컴했다. 게다가 그 꼭대기에서 차들은 하루 24시간을 시커먼 매연과 소음을 뿜어내며 달리고 있었다. 도시의 회색빛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 가운데 하나기도 했다.

십여 년쯤 전 청계고가가 철거됐고, 아현 고가가 철거 중에 있는데 2014년 올 한해 두 개의 고가가 더 철거될 예정이라 한다.

아현 고가는 우리나라 고가도로 1호다. 그건 역사적으로 기억할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고가의 철거가 능사냐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타당성이 별로 없었는데도 엄청난 돈을 들여 지었다가, 다시 불편하다고 부수는 과정의 되풀이, 과연 이게 올바른 일일까. 무조건 철거하고 없애버리기 보다 그곳을 어떻게 활용할까를 먼저 고민해보는 게 순서일 듯싶다.

얼마 전 서점에서 만난 그림책 〈호기심 정원〉(피터 브라운, 웅진주니어)은 이런 고민에 멋진 답을 준다. 책 첫 화면은 오늘 우리가 사는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시커먼 공장 굴뚝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한 회색빛깔에 사람들은 대부분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도시. 그 도시를 가로지르며 고가철도가 폐허가 된 채 버려져있는 모습이다. 이런 도시에 밖에 나가기를 좋아하는 한 아이가 있었다. 대부분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로 채워진 도시에서, 밖에 나가기 좋아 하는 아이는 분명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인다.

리암은 비오는 날 철벅거리며 온 동네를 쏘다니다 오래된 기찻길 근처에 이르렀고 마침 기찻길로 올라가는 어두운 계단을 우연히 발견한다. 그 기찻길은 이미 오래 전부터 기차가 다니지 않는 낡은 곳이었다.
▲ 하이라인 표지판.

▲ 돌로 만든 하이라인 벤치.
"동그랗게 모인 환한 색깔 뭉치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어요."

리암이 계단을 통해 올라와 본 기찻길의 첫 인상이다. 폐허가 된 기찻길에서 들꽃과 어린 나무를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가까이 들여다 본 식물들은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었다. 돌봐줄 손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리암은 꽃이나 나무를 키워본 적도 없으면서 정원사가 되기로 자청한다. 왜 그랬을까? 시들거나 죽어가는 생명을 보면 솟구치는 연민의 마음, 어쩌면 그게 인간의 본성 아닐까.

리암의 정성에 기찻길 식물들은 활력을 되찾으며 자신들이 사는 범위를 넓혀갔다. 쭉쭉 뻗은 기찻길을 따라 먼저 억센 들풀과 이끼가 가장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암은 뻗어가는 식물들을 따라 기찻길 구석구석을 탐험하고 돌아다녔다.

"정원은 오래되고 잊힌 것들에 특히 호기심이 많았어요."

리암의 발견은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오래되고 잊힌 것들, 보잘 것 없는 것들에 우리는 단 한 번의 관심조차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책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비교할 때 어마어마한 반전이다. 도시의 건축물들의 변화는 없었지만 기찻길에서 시작된 풀과 나무의 호기심은 이웃한 건물에까지 옮겨갔다. 칙칙한 잿빛에서 화사한 봄빛을 띤 도시로 탈바꿈이라니.

이 책은 실제 미국 맨해튼의 서쪽 하이라인에서 벌어졌던 일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이라인은 1930년대 공업지대였던 맨해튼 서부의 화물을 처리하기 위해 세워진 고가 철로였다. 당시 1억5천만 달러(현재 금액으로 20억 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공업지대가 쇠락하고 열차보다 트럭 등의 운송수단 이용이 늘면서 하이라인을 오가는 열차 수도 줄었다. 1980년 마지막 화물열차를 끝으로 하이라인도 폐쇄했다. 이후 하이라인은 철거와 보존의 선택 사이에서 오랜 시간 논쟁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보존 쪽으로 의견이 모아져서 맨해튼의 명물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맨해튼의 하이라인은 그 자체로 태동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롤 모델로 삼았던 프랑스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promenade plantee)'가 있었다. 1988년부터 파리시는 버려진 고가철로를 산책로로 변모시켜 '나무가 있는 산책로'라는 뜻의 녹지공간을 탄생시켰다. 버려진 혹은 쓸모없어진 도시의 흉물들을 제거하고 없애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라는 질문에 벌써 몇 개의 대답들이 나오고 있다. 물론 고가로 인해 피해를 보는 주변 상권에서 불만의 소리도 높지만 명물이 탄생한데도 불만의 소리가 지속될지는 미국과 프랑스의 사례를 보면 완전히 달라지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는 아직 버려지지도 않은 고가도로를 도시 디자인만 고려해서 마구 폐기하려 하는데, 그 공간을 거듭나게 할 방안에 대해선 얼마나 생각했는지 묻고 싶다. 재작년 우연한 기회에 이문재 시인을 만났다. 그는 도시를 내 마음이 내 안에 있지 못한 채 바깥을 헤매는 도시라 표현했다. 이 무수한 공간들 사이를 떠도는 도시인에게 감수성을 되찾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런 장소 가운데 하나로 도로를 꼽았다. 도시를 상하좌우로 횡단하는 무수한 도로에 차대신 흙으로 채우고 풀과 나무를 심자고 했다. 풀과 나무가 심어지면 새와 동물들이 모여들 테고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사람 역시 모이지 않겠냐고. 그때 나는 맨해튼도 프롬나드 플랑테도 모르던 때였는데 이문재 시인의 말을 듣자마자 무릎을 쳤다. 지금 생각하니 호기심 정원이 이루어냈던 풍경이다.

왜 우리는 이런 발상이 불가할까. 왜 우리는 차대신 나무와 풀과 새와 동물과 이웃의 이야기들을 과거의 도로에서 만날 수 없는 걸까. 그리고 우린 오래되고 잊힌 것들에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낼 순 없는 걸까, 진정.
▲ 소장 최원형 /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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