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산종사, 처음 동선을 난 후 중앙총부 공회당 앞에서 선객들과 사진을 찍다. (기사동선, 1930. 3, 하단 좌측에서 5번째가 대산종사, 상단 중앙 소태산대종사)
▲ 대산종사의 출가연원인 정산 송규 종사.
정산 송규의 연원으로 출가하다

대산종사는 총부를 다녀온지 3년 후인 원기14년 정월에 총부를 다시 찾아 조모의 연원으로 입교했다. 소태산대종사께 '대거(大擧)'라 법명을 받고 정산 송규 연원으로 출가서원을 올렸다.

대산종사는 출가 후 쇠죽을 끓이고 총부 임원들 머리 깎아주는 일 등을 하다가 정기훈련을 받으면서 습관을 개혁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았다. 대산종사는 총부에서 생활하면서 소태산대종사로부터 '삼계의 대도사 사생의 자부'에 대한 법문을 받들고 마음이 새로 열리고 눈과 귀도 열리는 듯했다. 그리하여 '내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 일이 아닌가?' '이 일 외에 또 다른 무슨 일이 있겠는가?'라는 결심과 서원이 확고해 졌다. 그 후 〈수양연구요론〉, 〈취지규약서〉 등 교서를 탐독하자 마음이 조금씩 열려가기 시작했다. 원기15년 정월, 전음광과 함께 소태산대종사의 은자(恩子) 결의인 은부자결의식(恩父子結義式)을 올렸다.

대산종사는 정산 송규에게 〈도덕경〉을 배웠다. 도덕경을 배우며 '노자님이 오셔서 가르친다 해도 더 이상 못 가르치시겠다'고 느꼈다. 이때 정산 송규가 "선생님이 아닌 형님이라고 불러라"고 하여 출가연원인 정산 송규를 형님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서원이 확립되다

대산종사는 소태산대종사께 "제가 무슨 일을 하면 될까요?"라고 여쭈었다. 그러자 소태산대종사가 "서기 일을 해라"고 했다. 그리하여 원기16년부터 3년간 서무부 서기 일을 했다. 이것이 대산종사의 전무출신으로서 첫 근무였다. 대산종사는 전무출신을 서원하기까지 많은 생각이 오고 갔지만 서원을 올린 후에는 오직 깨달음과 세상을 위해 헌신하려는 마음뿐이었다. 그리하여 〈월말통신〉 제35호에 자신의 뜻을 담은 '입지시(立志詩)'를 발표했다.

차신필투공중사(此身必投公衆事)
영세진심갈력행(永世盡心竭力行)
인생출세무공적(人生出世無功績)
사아평생하면괴(斯我平生何免愧)

이 몸을 기필코 공중사에 바치리니
영생토록 변함없이 있는 힘을 다 하리다
사람으로 태어나 세상 위해 큰일 못하면
평생토록 그 부끄러움 어찌 면 하리까.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다

대산종사는 성실히 근무하며 정기훈련에 입선했다. 그때 임실 관촌에서 선(禪)을 나러온 김성천화가 대산종사의 강연하는 모습을 본 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녀딸의 배필로 정해 놓고 추진했다.

대산종사는 20세 되던 원기18년에 임실군 관촌면 상월리 이근만과 조준관의 10남매 중 맏딸인 21세 영훈(永勳)과 결혼했다.

대산종사는 결혼 후 첫날 정토(正土, 부인)인 이영훈과 처가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 곳에서 자신의 포부와 장차 해야 할 일들을 털어 놓았다. 그리고 "저의 뜻을 따르겠습니까? 못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영훈은 평소에 사회의 차별제도에 회의를 느끼고 인간평등을 염원하며 세속적인 생활보다는 뜻있는 삶을 구상했기에 선뜻 찬성했다.

이영훈은 전무출신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다만 평소 생각과 부군의 뜻에 차이가 없음을 알고 따르겠다고 한 것이다. 대산종사는 첫날밤이 지난 새벽에 좌선을 했다. 이영훈은 평소 조모의 좌선하는 것을 보았기에 특별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영훈은 친정에서 생활하며 총부 정기훈련에 참석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