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근한 할아버지로 우리곁에 오시다'

이번 달에는 대산종사탄생100주년 기념대법회를 앞두고 대산종사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이에 1주는 심전계발 훈련, 2주 비닐하우스의 성자, 3주 종교연합운동·세계교화, 4주 미리 가본 기념대법회를 기획해 대산종사의 포부와 경륜을 체받도록 했다. 대산종사는 세계평화 삼대제언으로 심전계발 훈련, 공동시장 개척, 종교연합기구 창설을 제창했고, 이를 통해 평화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다.

시묘살이로 영모묘원 주석

대산종사를 추억하는 제자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비닐하우스에서 대중을 접견하는 성안이다. 왕궁 상사원에서 대산종사를 처음 배알했던 jtbc·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은 "보통 종교지도자들 같으면 으리으리한 좋은 집과 좋은 사무실에서 계실 것이고 위엄과 권위가 있을 것인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며 "왕궁에 물론 다른 건물들도 있었지만 계시는 곳은 너무나 검박하고 소박한 슬레이트집이었고, 또 교도들에게 설법을 내리시는 곳도 웅장한 대법당이 아니라 비닐하우스에서 접견을 하시며 설법을 하시는 것을 뵙고 상당히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고 기술한 적이 있다. 아주 온화하며 자비로운 모습은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감춘 큰 도인을 뵙는 인상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대산종사의 모습은 소태산대종사탄생100주년기념대회를 앞두고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한국사회에 '비닐하우스의 성자'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20여 년간 대산종사를 모셨던 인후교당 이성국 교무는 "왕궁 상사원 건물은 묘원 건설 당시 인부들의 숙소와 창고로 쓰였던 곳이다. 묘원에 주석하면서 대중들의 왕래가 잦아들자 접견할 장소가 필요했다"며 "비닐하우스를 지어 접견장소를 마련하라고 하명해 일을 착수했고, 초기 비닐하우스는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하우스에 스티로폼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장판 정도만 올려놓았다"고 회고했다.
▲ 대중 접견실로 사용됐던 비닐하우스.(익산시 왕궁면 영모묘원·1988년)
사실 대산종사의 시묘살이는 알봉(현 자선원 터)공원묘지가 왕궁으로 이전하면서 시작됐다. 대산종사의 유시에 따라 알봉묘지에 모셨던 교단 선진들을 원기70(1985)년 4월 왕궁 영모묘원으로 이장하게 된다. 익산시 왕궁면 동봉리 시대산에 위치한 영모묘원은 소태산대종사의 평등한 일원가족 정신에 바탕해 평장(平葬)과 평석(平石)으로 조성돼 있다. 원기68년부터 시작된 원불교 공원묘지사업은 토목공사부터 어려운 난관들이 많았으나 스승님의 염원에 따라 공사가 진행됐다. 어느 정도 터가 잡히고 묘지에 잔디가 올라오자 대산종사는 김제 원평을 떠나 원기73년 이곳으로 행가해 시묘살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때 대산종사는 "교단 초창기 선진들이 많이 계시니 마음이 편안하다"며 "옛날에도 효자는 3년을 묘 옆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나도 이곳에 오니 선진님들이 생각이 난다. 매년 추석 전후로 시묘의 정성을 바쳐 대종사를 비롯한 삼세 제불제성 모든 선영과 일체생령에게 효성을 다해 천여래 만보살에게 대불공을 올리자"라고 법문을 내렸다. 대산종사의 말년 시묘살이는 정재계 인사 뿐 아니라 많은 대중에게 생생한 법문과 삶으로 감명을 줬다. 정중(靜中) 삶이었지만 동적인 활불상을 나툰 것이다.

관 뚜껑으로 만든 접견 의자

왕궁 상사원에 주석할 때 당시 대통령후보들은 다 다녀갔고, 재계의 거물들도 다 이곳에서 접견했다. 그런데 당시 이들이 앉았던 의자가 관 뚜껑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비닐하우스 접견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관 뚜껑 의자다. 왜 하필 관 뚜껑을 의자로 만들 생각을 했을까. 여기에는 대산종사의 깊은 법문이 숨어있다.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이치를 깨치라는 뜻이다. 원100성업회 주성균 교무는 "대산종사의 하루 일과 중 제일 먼저 반갑게 묻는 질문 중 하나가 '오늘은 몇 분이 들어오시는가'"라며 "매일 묻고 물어도 질리지 않고 계속 물으시기에 입묘(入廟)자가 없으면 오히려 죄송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만큼 묘원에는 입묘자가 많이 들어오면서 관 뚜껑들이 남아돌았다는 뜻이다. 상여가 들어오면 관 뚜껑을 태우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대산종사는 달리 생각한 것이다. 망자의 것이지만 한번 쓰고 버려지는 관 뚜껑이 아쉬워 의자로 재생시켜 썼다. 관 뚜껑의 활용은 여기 머물지 않고 밥상, 책상 등으로 화려한(?) 변신을 거듭했다. 비닐하우스 접견 후 긴 의자에 앉아 대산종사의 양쪽 손을 잡고 찍었던 단체사진을 기억할 것이다. 그 긴 의자도 관 뚜껑을 재활용했다는 사실. 150여 명이 들어갈 수 있었던 비닐하우스는 옹색하고 촌스러웠지만 대산종사의 경륜과 포부가 담겨져 있다. 대산종사는 일일이 대중의 손을 잡아주며 파수공행(把手共行)을 약속했고, 함께 사진 찍기로 영생의 인연을, 그리고 선물로 준 모감주는 꼭 성불하라는 염원을 담아줬다. 그래서일까. 항상 염주는 손수 돌려 윤기를 낸 후 건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 단전호흡하는 대산종사.
왕궁 상사원, 비닐하우스 접견

주 교무는 "11년간 주석했던 왕궁 상사원은 풍수 지리적으로 좋은 길지는 아니다"며 "매사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대산종사는 살려내고, 키워주는 법문을 평소에 많이 내렸다. '과거의 음지가 양지가 된다'고 늘 강조했다. 대산종사는 일관되게 좋은 집, 큰 집보다는 작고 허름한 처소를 택해 대적공의 삶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삶의 궤적이 한결같아서 신도안에 주석할 때도 초가집이나 너와집에, 벌곡 삼동원, 원평 구릿골로 옮길 때도 마찬가지로 누추한 처소를 스스로 택한 것이다. 왕궁 상사원의 거처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왕궁 상사원은 사실 조용한 곳이 아니다. 영모묘원이 있기에 어떤 때는 하루 종일 목탁소리, 염불, 성주 등 망자들의 천도를 기원하는 의식과 유족들의 비통한 곡소리, 슬픔이 배어나오는 장소다. 간혹 꽃상여에 요령을 흔들기도 했다는 증언이다. 대산종사는 조석으로 대종사성탑이 조성된 총부를 향해 심고를 올렸고, 선진묘역에 조석 문안을 드렸다. 또한 묘역에 안장된 영가들에 대한 해탈천도 축원을 잊지 않았고, 유주무주고혼까지도 천도의 정성을 다했다.

왕궁 시묘살이의 원천은 사시정진이었다. 수도인으로 아침 수도정진, 낮 보은봉공, 밤 참회정진을 이어갔고, 잠은 늘 선몽(禪夢)에 머물렀다. 새벽에 일어나 법신불 전 심고를 시작으로 도인법, 선과 기도를 마치면 대중과 더불어 요가를 즐겨했다. 대중들을 맞아 야단법석을 마련해 법을 설했고, 교도들의 신앙 수행 감상담을 들으며 선보(禪步)로 산책하고 늘 대중들의 손을 잡고 함께한 것이다. 그래서 왕궁에 가면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어른이었고, 아픈 자의 손을 잡아주는 할아버지이자 촌로로 곁에 있었다.

공원묘지·훈련원 세우다

대산종사가 왕궁면 동봉리로 행가 했을 때 "영모묘원은 일원사당이고 대 세계 사당이니 그곳에 공원묘지만 짓지 말고, 그 옆에 훈련원을 지어 교구 요인들을 훈련시킬 수 있도록 하라"고 부촉한 적이 있다. 묘원 건너편에는 쇠솥골이라는 작은 골짜기가 있다. 지금은 중앙중도훈련원이 들어섰지만 당시에는 논과 밭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산종사는 산책코스로 항상 이곳을 지나갔다. 그러면서 쇠솥골 터에 멈춰 기도하고 염원하며 훈련원 터를 점지해 준 것이다. 나중에 이곳에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법명 중덕)·홍라희(도전) 부부가 훈련원을 지어 희사해 앞 법호를 따 중도(重道)훈련원이 됐다. 영모묘원은 납골당 사업으로까지 확대됐고, 훈련원은 전무출신 뿐 아니라 교도들의 대적공실로 교단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왕궁 상사원 비닐하우스 접견실은 4월에 복원될 예정이다. 초창기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을 예정이어서 참배객들에게는 '비닐하우스의 성자 대산종사'를 다시한번 추억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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