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상의 수행은 왠지 삼학(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 수행에 가려져서 교단 내에서 회자가 덜 되어왔다. 일원상의 수행을 설명할 때도 삼학으로만 하려고 했지 일원상의 수행을 삶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등한시 해온 것도 사실이다.

삶 속에서 원만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것이 어떤 삶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회화하기보다는 삼학으로 결부 짓기에 바빴다. 하물며 알고 양성하며 사용하자는 것마저도 삼학으로 설명하려는 억지스러움이 있을 정도였다. 일원상의 수행이 삼학에 가려서 남의 자식처럼 취급을 받아왔다.

진리는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진리의 속성인 공원정을 원리로 해서 수행하는 것이 삼학이고 그 공덕이 삼대력(수양력, 연구력, 취사력)이다.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다는 것을 삼대력으로 연관 지어 비교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 마음을 알고 양성해서 사용하자는 것을 삼학으로 결부시키는 것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다는 것은 삼대력처럼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그리고 알고 양성하고 기르자는 것은 삼학처럼 갖추어가는데 필요한 수행이거나 행동 양식이 아닌, 수행의 경로다. 수행의 경로를 삼학이나 삼대력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실치 못하다. 알고 양성해서 사용하자는 것을 견성, 양성, 솔성으로 보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수행상 맞지 않다. 견성, 양성, 솔성은 성품을 알고, 성품을 기르며, 성품을 거느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일원상의 수행에서의 알고 양성해서 사용하자는 것은 견성, 성불, 제중처럼 수행해가는 수행의 경로다.

결정적으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원상의 수행에서 양성은 성품을 기른다는 뜻의 양성(養性)이 아니다. 기를 양(養)에 이룰 성(成)자를 쓴다. 즉 우리의 마음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것을 내면화시키자는 뜻의 양성(養成)이다. 즉 이 양성은 자신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마음이 되어서 존재하자는 것을 일컫는다.

진리적 인격으로 지녀야 할 덕목과, 수행의 경로를 혼돈해서는 안 된다. 수행을 하려다보니 일원상의 수행과 삼학 수행을 연관시키지 않을 수 없지만, 무조건 삼학으로 들이대는 것은 이젠 좀 삼가야 한다.

일원상의 수행을 삼학 수행의 징검다리 정도로만 생각하게 해서는 곤란하다. 일원상의 진리를 인격화한 모습을 단적으로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보았고, 이 진리에 접근해서 인격을 이루고 세상을 위해 살아가라는 큰 틀에서 일원상의 수행을 바라보아야 한다. 일원상의 수행으로 수행자들의 마음과 삶에서 살아나서 생명력을 얻을 때, 삼학 수행으로 채우고 정밀하게 이뤄갈 수 있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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