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와 요리사가 만나는 특별한 장터

▲ 마르쉐에서 운영하고 있는 씨앗도서관에서 5종류의 토종씨앗을 대출받아 1년후 반납할 수 있다.
몇 시간이고 돌아다녀도 끄떡없는 편한 복장에 운동화, 손에는 텀블러와 개인식기를 장착한다. 거기에 딸기모종도 담고 토종씨앗도 담을 에코백까지 어깨에 둘러매면 출격 준비 완료. 매월 둘째주 일요일 서울 대학로에는 일명 '마르쉐 패션'들이 눈에 띈다. 농부에게 채소를 사고 요리사의 '한땀한땀' 장인정신을 맛볼 수 있는 도시형 장터 마르쉐(Marche:프랑스어로 '장터'라는 뜻), 2012년 10월 문을 연 뒤 매달 더 많은 '홀릭(중독)'을 양산하고 있는 '마르쉐@혜화동'를 찾았다.

'씨앗을 대출해 주는 씨앗도서관'

'거짓 없는 정직한 직업인 농부와 요리사, 이들을 도심에서 직접 만날 순 없을까?' 마르쉐의 시작은 단순한 이 질문이었다. 런던의 첼시 파머스마켓(Chelsea Farmers Market)이나 케이프타운의 플리마켓 등 전 세계 주요도시에서 주기적으로 열리는 생산자들의 직거래 장터가 마르쉐의 모델이다.

소비자들은 농부의 손을 보고 식재료를 사고 요리사의 설명을 들으며 먹거리를 구입한다. 여기에 마르쉐는 수공예팀을 더해 품목의 다양성을 높였다.

매달 열리는 마르쉐는 계절에 맞게 주제를 바꿔단다.

9일 열린 3월 마르쉐의 주제는 '씨앗'. 게으름을 피우며 더디게 오는 봄을 재촉하는 씨앗장이 오전 11시부터 펼쳐졌다. 개장 전부터 하나둘 모여든 사람들은 텀블러나 에코백만으로 서로를 '감지'한다. 안내판이 서고 가판들이 갖춰지는 동시에 장보기를 시작하는 시민들의 표정은 이미 부자다.

'믿을 수 있는 농산물과 음식을 사고 팔며 상생하는 도농관계를 통해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든다'는 취지로 시작한 마르쉐의 정확한 이름은 '마르쉐@혜화동'이다.

지금은 한 곳에서만 열리지만 앞으로 더 많은 장소에서 열리기 바라는 마음에서 장소를 바꿔 붙일 수 있도록 '@'을 이용했다. 실제로 이곳보다 먼저 계획했던 '마르쉐@합정'이 무산된 바 있는데, '@혜화동'은 아르코예술극장이 앞마당을 무상으로 대여하겠다는 결정에 의해 가능했다.

한달에 한번 오전11시부터 오후4시까지 딱 5시간 열리는 마르쉐의 유경험자들은 가판 앞에서 망설이지 않는다. 제주에서 올라온 무농약 한라봉, 충남 홍성에서 온 쌈야채, 신안에서 올라온 소금 등은 돌아서면 매진될까 보자마자 집어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기있는 품목은 3월 주제인 '씨앗'. 전국 방방곡곡 좋은 땅에서 맑은 공기와 물을 먹고 결실 맺은 수백 종류의 씨앗들이 소비자들의 에코백에 파고들었다.

마르쉐의 단골 농부 '우보'의 우보농장은 바구니 한 가득 볍씨를 판매했다. 페트병을 잘라 흙을 젖게 유지하면 쌀을 기를 수 있다는 거짓말같은 이야기에 소비자들은 노트까지 꺼내들고 즉석에서 수업을 받는다.

실제로 유치원에서 페트병 벼농사를 지도하고 있는 '우보'의 얼굴과 팔은 까맣고 단단하게 그을려 있었다. '흑생', '북흑조', '자광도', '버들벼' 등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토종쌀이 있는 줄 몰랐던 농사 까막눈들이 볍씨들을 사가며 가을 벼수확을 꿈꿨다.

'씨앗도서관'이라는 특별한 이름이 눈길을 잡는 '토종씨드림'은 단연 스타다. 소비자들은 이 곳에서 씨앗을 대출받고 1년 뒤 역시 씨앗으로 반납하는 '도서관'이다.

이 곳은 작년 3월 '개눈깔콩', '호랭이밤콩', '염주율무' 등 이름도 예쁜 토종씨앗 5종을 대출해 주고 1년 뒤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씨앗들 중에 1종류만 성공해 반납한 초보농부에게 작년 보증금 5천원을 돌려주자, '올해는 적어도 2종류는 성공할 것'이라며 씩씩하게 다시 대출을 해가기도 했다.

정오가 넘어가니 요리 가판의 줄이 길어졌다. 물론 요리도 친환경 유기농 식재료를 이용하며, 요리하랴 설명하랴 각각의 재미난 사연들이 양념처럼 담겨있었다. '빵굽는소녀햄냥'은 주제 '씨앗'에 맞춰 천연발효종과 우리밀을 이용한 빵을 내놓았다.

더구나 직접 키우고 있는 천연발효종을 나눠주고 다음 마르쉐 때까지 키워오면 새 빵으로 교환해주는 깜찍한 아이디어를 실현시켜 홈베이커들이 열광하기도 했다.

먼저 끝나도 떠나지 않는 이웃

이 특별한 장터 마르쉐, 어떻게 이용할까? 마르쉐는 도심 속에 푸름과 생명을 불어넣는 장터인만큼 특별한 규칙들도 뒤따른다.먼저 소비자들에겐 텀블러와 개인식기 지참이 권장된다.

그저 권장만이 아니다. 텀블러 지참시 음료가격 20% 할인, 수제잼을 담아갈 빈 병을 가져오면 1천원 할인 등의 혜택을 누리는 쏠쏠함도 있다. 혹 깜빡 잊었을 경우 파는 곳에서 식기가 주어지지만, 1~3천원의 보증금이 있어 다 먹고 돌려줄 때 반환받을 수 있다.

입점에 있어서는 우선 도시농부와 초보귀농자를 우대하지만, 그보다 먼저 생산자와 소비자의 소통과 관계를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만큼 자신과 물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참가자를 뽑는다. '물건 판매보다 수다가 우선'인 덕에, 60개에 달하는 참가팀들은 자신의 물건이 소진돼도 가판을 치우거나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장사를 끝낸 이웃 입점팀이나 소비자들과 잔디밭에 둘러앉아 먹거리도 먹고 수다도 떤다. '이웃이 있어야 내가 있다'는 마르쉐의 원칙 덕분이다.

폐장인 4시가 가까워지자 공연도 마무리되는 한편, 각종 시연과 막판 판매에 불이 붙었다. '먹을 수 있는 모든 재료로 피클이 가능하다'는 타카타 농부의 '도레미팜'에는 색색의 피클들이 봄볕에 반짝거렸다.

마른나물 현미 떡볶이에 포크를 꽂은 채 유기농 마요네즈 시연에 참석했고, 수제맥주와 타락죽, 리예뜨를 잔디밭에 펼쳐놓은 다국적 피크닉도 펼쳐졌다. 줄을 길게 서도 짜증내지 않으며 소비자가 넘치는 질문을 해도 얼굴 찌푸리지 않는다.

파는 농부도 사는 도시인도 모두 웃는 낯인 '마르쉐 스타일', 시골에서 도시에서 흙을 만지고 생명을 키워내는 씨앗 한줌씩을 든 마르쉐 사람들이 봄을 재촉하고 있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