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사정 알아주신 산 부처님

▲ 백상범 교도 / 동전주교당
원기37년 광주사범학교 2학년 무렵 근동에 친척인 정성심 언니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내게 원불교를 가자고 했다. 내겐 집안 누구도 원불교와 인연된 사람이 없었기에 생소하고 별 뜻이 없어서 거절했다. 그런데 자꾸만 졸라대는 바람에 한번 따라 갔다. 나는 교무님께 매료되어 몇 달동안 열심히 교당을 나갔다. 그러나 3학년 졸업반이 되니 공부나 교생실습, 악기연주 등 익혀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교당에 못나간 채 졸업하고, 계속 전근해야 하는 교직생활 관계로 십 수년 동안 원불교와 인연을 멀리하다가 전주동국민학교로 발령 받게 됐다.

그 뒤 결혼도 하게 되고 아이도 둘을 낳았다. 그 시절엔 육아시설이 전무하기 때문에 아이를 돌보지 못하고 작은 심부름 하는 아이에게 맡기고 학교생활, 가정살림, 아이 기르기 등 모두를 겸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그만 애 봐주는 아이의 실수로 둘째 아이가 큰 화상을 입게 됐고 만 하루 치료도 못하고 12시간 만에 아이를 잃고 말았다.

큰 죄책감을 느끼면서 침울해 하니까 동학년 동료인 김희준(전주교당 교도)교사가 "원불교에 가서 천도재를 지내줄까?"하고 물었다. 나는 그제서야 정신이 드는 것 같고 원불교란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이에게 속죄하려는 마음에서 "그러자"고 했다.

4재부터 전주교당에 가서 발타원 정진숙 종사님과 서치선 교무님의 인도로 재를 지냈다. 천도법문에 '모든 것이 그 아이가 지은 바'라 하는데 도무지 수긍이 가지 않았다. '어찌 어미의 과오가 그 아이의 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낳아만 놓고 길러주지도 못한 어미를 그리며 긴긴 날을 보냈을, 아니 그렇게 억울하게 가면서도 "엄마 으응, 엄마 으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던 아이, 오히려 어미를 위로하며 마지막 길을 간 그 자식이 무슨 죄를 지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당시 초대 교무로 시타원 심익순 교무님이 오셨다. 솔직 담백하고 소탈 알뜰하시며 설교 또한 감동을 주시는 시타원님을 따르고 존경했다. 어느 날 시타원님이 "신도안에 종법사님을 뵈러 가자"고 했다. 나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같이 가자"고 약속해 놓고 그만 몇 초 사이로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아마 시타원님께서는 대산종법사님께 오늘 같이 오려 했던 제 이야기를 자상히 말씀드렸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 뒤 김대현 교무님이 오시니 인품이 참으로 인자하시고 법이 높으셔서 교당은 곧 활기를 찾아갔다.

어느 날 교무님이 "원평에 종법사님을 뵈러가자"고 하시어 벅찬 마음으로 원평교당에 갔다. 종법사님께서 거처하시는 조실은 생각보다 작고 허술했다. 교도 두 세분과 함께 방에 들어가 인사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 적타원님께서 저를 가르키며 첫마디에 "종법사님 이 사람 아시겠습니까?"하자 "으응 알아. 그 애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만 기겁해서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무척 부끄러웠다. 제가 지은 모든 죄도 다 알고 계시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 속에서도 한없는 희열심이 솟구치고 있었다. '옳다. 바로 산부처님께서 나의 앞길을 열어주시리라. 이 회상은 저런 산부처님이 주재하시는 곳이구나'

오는 길에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세상에는 가만히 앉아계셔도 천리 만리를 다 꿰뚫어 보시는 부처님이 계신다는데 오늘 실감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뵙지도 못했고 내 삶에 대해 한 마디 여쭌 바도 없는데 그걸 아시다니, 그제서야 나는 수년 전에 가버린 자식만 그리는 불쌍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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