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자·소제·소동의 큰 가르침

▲ 백인혁 교무 / 원광대학교당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총부로 개나리 봇짐을 가지고 출가하여 총무부에서 간사로 근무하며 살았다. 대산종사님이 종법사님으로 보위에 계시던 때였다.

지금은 변해서 당시 모습을 그리기가 어렵지만 대산종사는 지방에서 찾아온 누군가의 손을 꼭 잡아주시며 자주 송대 대종사성탑 옆 소나무 아래 돌로 둥글게 만든 자리에 나오시어 형산·성산종사를 좌우에 앉게 하시고 대중에게 법문을 해 주셨다.

당시 들었던 법문 중에 "나는 십육세에 출가한 후 교단에 살면서 무엇이 되려고도 하지 않고 무엇이 된 일도 없다. 그저 십육세시 대종사님 모시고 살던 십육세의 소자(小子)요, 소제(小弟)요, 소동(小童)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살지 무엇을 했다는 생각 하나도 없다"는 말씀을 했다. 그 뒤에도 자주 이런 내용의 법문을 받들며 '대산종사는 그렇게 사셨나 보다'하였는데 어느 날 문득 대산종사를 닮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대산종사의 무엇을 닮을까 하다가 '평생을 소자·소제·소동으로 살으셨다'는 법문이 떠올랐다. '그래 이 법문을 받들어 먼저 나의 일생을 그렇게 살아보자'고 다짐을 했다.

그때는 나이가 어려서 참으로 쉬웠다. 그저 어른들이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고 사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하라는 것은 하고 말라는 것은 안하는 것이 큰 힘이 들지 않고 수월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고 교단에서의 연륜이 쌓이면서 이 법문을 받들기가 자꾸 어려워졌다. 공부하면 할수록 더 쉬워져야 하는데 더 어려워지니 이 공부가 더 매력이 있어졌다.

'그래 이 공부를 계속하여 끝까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왕 시작한 공부 잘 해보자고 다짐하며 오늘도 살고 있다.

다음으로 대산종사를 모시면서 평생 닮고 싶었던 모습을 뵌 것은 학교를 졸업하고 완도소남훈련원 주사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면서 모실 때였다.

훈련원 터는 원광대학교 약학대학 교수를 역임하신 김재백 박사의 부친인 소남 선생이 일본산 삼나무를 많이 심어 아름드리로 키워서 우리 교단에 희사하신 곳이다. 처음에는 요양원으로 사용하다가 대산종사가 이곳을 해외교화 전진기지라 하시며 세우신 훈련원이다.

훈련원 봉불식을 마친 후 대산종사는 정양차 여름이면 소남훈련원에 행가하시곤 하셨다. 어느날 하루는 대산종사가 계곡이 굽이쳐 흐르고 소나무가 무성하며 소나무 사이 사이에 돌덩이가 많은 곳으로 산책을 나오셨다.

산책 후 대산종사는 내일부터는 이곳을 정리하자 하시고 그 곳에 나뒹구는 돌들을 앉기 좋게 놓으라고 하셨다.

따르는 많은 대중들은 크고 작은 모든 돌들을 사람들이 앉아 있기 좋게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제자리를 찾아 놓았다. 아무리 못생긴 돌덩어리도 계속 돌리고 다른 작은 돌로 괴고 하여 제자리를 잡게 하였다. 그리하여 수백대중이 앉아 법회를 볼 수 있는 장소를 만드시고 그곳을 '만불전(萬佛殿)'이라 부르게 하셨다.

대산종사는 아무리 큰 돌일지라도 잘못 앉아 있으면 제자리를 찾을 때가지 손보아 주셨다. 어디 돌만 그러셨으랴? 세상 모든 사람들 그리고 더 나아가 미물 곤충까지도 다 제 역할을 하도록 그리 하셨을 것이다.

오매불망 소태산대종사와 정산종사를 모시고 소자요 소제요 소동으로 살면서 한낱 철없던 후진들을 교단의 동량으로 키우기 위해 다듬어 주신 따스한 손길이 지금도 한없이 그립기만 하다.

항상 모시며 평생토록 그분을 닮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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