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기관, 서울 이전이 시대의 요청

▲ 고세천 교무 /순창교당
1916년 전남 영광에서 시작된 원불교가 창업 1세기를 마감하고 2세기를 앞두고 있다. 교화 교육 자선사업을 바탕으로 '새시대 새불교' 로서 제도를 완비한 원불교는 창립한도 2대 3회인 1980년대 말 까지 농촌사회를 중심으로 한국사회에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며 종교의 참신성을 일깨웠다.

하지만 3대 1회가 시작되는 1988년 이후 대한민국이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시기에 변화의 흐름을 타지 못한 패착(敗着)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30년 동안 교도숫자가 늘지 않고 답보상태에 빠져있다. 원인은 기성종교의 제도를 답습하고 정형화된 울타리를 쳐 외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아 구성원들의 의식이 정체(停滯)됐다는 것이다. 젊은 원불교의 장점은 몸이 날렵하기에 의사결정이 쉽고 빠르게 움직여 시대의 조류에 부합할 수 있음에도 현실에 안주하고 행동은 보수화되기 시작한다. 여자교무들의 독신제도가 고착화된 것도 그 예의 하나이다.

대종사는 기성종교의 틀을 없애고 혁신을 하고자 하였지만 지도부는 원불교라는 형상을 고정하고 이것이 원불교의 정통성이라 규정하면서부터 우리는 이른바 원만하고 지공무사한 틀에 갇혔다. 젊고 싱싱함은 유연하고 활발하고 생동감이 넘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 2천년된 기성종교의 경건함, 엄숙함이라는 옷을 입히니 몸은 젊은 원불교지만 행동과 사고는 늙은 원불교로써 생기 발랄함을 잃었다. 유연한 사고 혁신적인 실행에 뒤떨어진 교단은 창립한도 3대 3회 30년간 사회변화에 부합하지 못함으로써 호남과 농촌에 바탕한 조용한 종교로 낙인(烙印)되었다.

물론 원불교가 큰 교세를 펼치지는 못하였지만 4대종교의 반열에 오름으로써 약진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교도숫자는 30년 정체이지만 원광대학교를 필두로 한 교육사업과 복지법인 삼동회를 중심으로 한 복지사업 그리고 원음방송국 개국, 군종장교 파견, 대통령 국장(국민장) 의식 참여 등으로 대사회적인 공신력이 쌓여 더 이상 유사종교 내지 사이비 종교라는 오명은 받지 않게 되었다.

원기9년인 1924년에 익산총부를 건설하였으니 90년간 익산시대를 열었다. 토지가 넓고 교통이 발달되었으며 무산자들 생활과 회원들의 내왕이 편리하기에 새회상 첫 총부가 되어 원불교의 발전을 견인해 왔다. 영산에서 4년, 변산에서 5년, 익산에서 90년 이렇게 원불교가 100년간 발전해왔다. 하지만 갈수록 지방과 수도권의 격차는 커져 더 이상 익산시대만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원불교는 세계종교를 지향하고 금강산에 세계종교본부를 세운다고 할 때 한국의 중심지인 서울을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다.

정치 경제와 행정 문화의 중심인 서울로의 이전은 교단의 보폭을 넓힐 수 있을 뿐 아니라 호남이라는 지역색도 탈피할 수 있다. 중앙총부는 종법사가 주재하면서 신앙과 교육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행정을 관할 하는 교정원은 서울로 이전한다면 2천만명을 대상으로한 수도권교화가 탄력을 받을 것이다. 바야흐로 용산(서울)에서 다시 한번 원불교가 용트림하여 물질개벽을 기반으로 정신개벽을 향도하는 젊고 패기있는 원불교가 되길 염원하고 함께 의지를 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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