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작은 의문 포기하지 않았던 집념 소유자

대각의 달 4월을 맞아 '소태산대종사, 깨침을 논하다'는 기획을 마련했다. 1주 대종사 구도와 대각의 의미, 2주 대종사의 중생교화, 3주 깨달음과 현대문화, 4주 객관적 시각에서 바라 본 원불교 100년의 진단를 기획했다. 이는 대종사의 깨침을 다각도로 조명해 보자는 취지다.

▲ 조희욱 교도의 강변입정상 작품. 33 x 32 x 83cm 폴리코트(FRP)+동분착색.

진섭(소태산대종사의 아명)이 태어났을 당시의 대한민국의 역사는 고난의 시대이자 대전환의 시대로 기록하고 있다.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에 이어 19세기 영국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혁을 겪은 서양이 자원과 식민지 확보를 위해 동양으로 향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였던 것이다. 진섭이 탄생한 19세기말은 한반도를 향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계속되고 있었던 시기였으며, 이에 따라 조선왕조 지배체제가 파탄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나라를 잃은 백성'의 상실감과 누구를 믿고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상황, 진섭은 1891년 전남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에서 태어난다.

포기하지 않은 의문

어린시절 진섭의 가치관 형성과 20년이 넘는 구도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은 동학농민혁명으로 평가된다. 1894년 본격적으로 한반도를 뒤흔든 동학농민혁명은 그 뜻에 동감한 전국의 민초들에게 퍼져나갔는데, 이 와중에 유혈사태가 일어나거나 마을을 약탈하는 무리를 낳는 부작용도 있었다. '동학군이 온다'는 소문은 두려움 그 자체였으며, 영광 읍내에서도 10km나 떨어진 길룡리 주민들은 불안에 휩싸였다. 소태산대종사 구도의 출발점인 '의문'의 시작을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동학은 어떤 사람들이고 왜 이런 일을 벌이는지 알지 못한 채 무작정 두려워만 하는 무기력한 동네 사람들이 어리지만 총명한 진섭의 눈에는 자못 이상했던 것이다. 4세 때 아버지 박성삼을 놀라게 하겠다고 약속한 후 낮잠 자는 아버지에게 '동학군이 온다!'고 소리쳤던 일화는 진섭의 의문과 대담무쌍한 성격을 보여준다.

7세경 진섭은 자연현상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으며, 삶과 죽음, 인생에 대해 궁금해 한 것은 9세때의 일이다. 인간보다 자연에 먼저 의문을 품을 것은 당시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격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늘 일정하게 변화하며 어머니의 품처럼 자애로운 자연현상에 대한 의문이 소태산대종사 구도기의 시작이었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평가받는 성자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 '의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상의 모든 어린아이들이 숱한 의문을 갖고 어른들에게 묻지만 이내 단절을 경험하고 포기해 버린다. 그러나 성자들은 이 의문을 해결할 때까지 기도를 하거나 스승을 찾는 노력을 이어간다. 진섭은 산신이나 도사를 찾고 기도를 거듭한 10대의 말미에 결국 모든 것을 스스로 깨쳐야함을 인식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축적된 의문에 몰입이 되는데, 이로써 '입정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자비심과 공동체 정신의 은혜

그러나 진섭에게 입정기의 시작은 혹독한 과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결심으로 삼밭재에 초막을 짓는다. 그러나 시작하기도 전에 구도기의 가장 큰 전환을 맞아야 했다. 나라를 잃게 된 와중에 부친의 열반으로 후원자가 사라졌고, 이에 따라 빚을 갚는 한편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일이 고스란히 진섭의 몫이 된 것이다. 그러나 주변의 도움으로 주막까지 시작하고서도 늘 바로 옆 귀영바위 굴에서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현실과 이상, 생계와 구도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괴로운 탄식의 세월이었다. 결국 진섭은 날로 심해지는 빚 독촉에 시달린 나머지 장사에 나서고 3개월만에 빚을 갚고 다시 구도를 이어간다.

귀영바위굴이 구도 초기의 주된 장소였다면 중기는 연화봉, 말기는 노루목으로 정리된다. 특히 연화봉에서 지낸 시기는 부인 양하운과 주막을 같이 한 바랭이네(훗날 이원화), 천정리의 선비 곽문범, 친구 김성섭(훗날 팔산 김광선) 등의 역할이 컸다. 거의 먹지도 입지도 자지도 않았던 진섭을 보살피고 기도했으며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곳에 안내하기도 했다. 조건없는 자비심과 공동체정신으로 결국 대각을 이뤄낸 진섭이 세상의 이치를 은혜의 관계로 풀어낼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의 은혜 속에, 소태산대종사의 혜문은 조금씩 열려가고 있었다.

'자신만의 깨달음'을 '모두의 깨달음'으로

김성섭은 오도카니 입정에 빠져있는 진섭에게 매일 아들 홍철을 시켜 조밥 한 그릇을 갖다주곤 했다. 홍철이 가면 어떤 때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게 조용했지만, 어떤 때는 자신도 모르는 문장들을 쏟아내곤 했다. 매일 대종사를 지켜보는 동안 성섭은 진섭이 쏟아낸 문장을 외워 기록으로 남기는데, 〈대종경〉 전망품 2장의 '만학천봉답래후(萬壑千峰踏來後)'로 시작되는 한시가 바로 그 기록이다.

소태산대종사는 훗날 이 시기를 "혜문이 열릴 때는 모든 것을 다 알 것 같다가도, 닫힐 때는 손가락 하나도 꿈쩍할 수가 없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던 1916년 4월28일 새벽, 기진맥진한 진섭이 모든 것을 포기한 바로 직후, 그의 열고 닫히던 혜문이 완전히 열리며 '대각'을 이루게 된다. 어떤 것도 아니면서 또한 모든 것으로부터 오는 에너지,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으며 희망도 절망도 아닌 상태에 이르자 진섭의 모든 행동과 생각이 걸림없이 자유로워졌다. 분별과 주착이 사라진 텅 빈 자리, 모든 것에 너그러워 지는 진섭의 대각은 곧 여유로움이었다.

소태산대종사의 대각은 개인적 의문에의 갈증과 내면의 궁구로부터 세상으로 시선을 향하게 하는 변화의 계기였다. 모든 것이 은혜의 관계로 이어져있는데도 실제 현실에서는 불신과 탐욕이 넘쳐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시대적 또는 구조적 고난 해소를 위한 변혁, 즉 개벽을 향한 실천이 시급했다. 소태산대종사는 저축조합운동(1917), 간척지개척운동(1918~1919), 기도결사운동(1919) 등을 펼치며 '자신만의 깨달음'을 '모두의 깨달음'으로 확장했다.

원불교가 '깨달음의 종교'인 이유 역시 교조인 소태산대종사의 깨달음이 그 자신만의 것으로 국한되지 않고 더 많은 대중과 더 큰 세상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업적이나 카리스마로 이룩하는 종교가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이 깨닫도록 이끄는 종교가 소태산대종사가 바라던 모습이다. 잃어버린 것이 많은 이 시대, 자신이 어렵게 이루어낸 큰 깨달음을 아낌없이 세상에 펼친 소태산대종사의 마음과 의지를 되새겨야 할 때다.

내면의 구도를 시작한 귀영바위굴

대종사의 구도터들 대부분은 안타깝게도 정확히 기록되지 않거나 이미 허물어져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대종사가 21세부터 23세 여름까지 머문 곳이 귀영바위굴이다. 대종사가 부친상을 당하고 난 뒤 빚 독촉에 시달리던 당시의 괴로움과 구도에의 열정이 집약된 공간이다. 당시 박성삼의 친구이던 김성서가 진섭을 안타깝게 여겨 조카 바랭이네와 함께 주막을 차려주었는데, 진섭은 주막을 바랭이네에게 맡긴 채 홀로 귀영바위굴 속에서 입정 삼매에 빠지곤 했다. 이 귀영바위굴에서의 시간을 통해 대종사는 외부에서 찾아오던 구도를 내면으로 돌리는 자력수행기에 접어들었다.

서문성 교무는 성지순례마다 이 귀영바위굴에 앉아보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 그는 "많은 곳들이 지금도 사라져가고 있는 이 때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귀영바위굴의 의의는 아주 크다"고 밝히며 "이 역사적인 장소를 좀 더 귀하게 여기고 보호해야한다"고 밝혔다.

그는 성지순례를 함께 하는 교도들에게도 "대종사가 구도하던 바로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귀한 기회라고 설명한다"며 "특히 대각의 달에 꼭 찾아 당시 대종사의 고민과 구도정신을 되새겨 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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