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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대종사, 깨침을 논하다 / 2주 대종사의 중생교화
소태산대종사, 깨침을 논하다 / 2주 대종사의 중생교화
  • 정성헌 기자
  • 승인 2014.04.11
  • 호수 1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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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중생 제도하겠다던 포부, 훈련법과 교화단
대각의 달 4월을 맞아 '소태산대종사, 깨침을 논하다'는 기획을 마련했다. 1주 대종사 구도와 대각의 의미, 2주 대종사의 중생교화, 3주 깨달음과 현대문화, 4주 객관적 시각에서 바라 본 원불교 100년의 진단을 기획했다. 이는 대종사의 깨침을 다각도로 조명해 보자는 취지다.
▲ 소태산대종사와 9인 제자가 이뤄낸 방언공사로 이뤄낸 정관평. 유기농법으로 쌀농사를 짓고 있다.
소태산은 중생제도를 하기 위해 어떤 교화를 펼쳤을까? 그의 일생 자체가 중생제도를 위한 삶이었기 때문에 따로 분리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이 될지도 모른다.

그는 대각을 이룬 뒤 장차 시방 세계 모든 사람을 교화할 것을 꿈꾸었고, 원근각처의 모든 사람을 고루게 훈련시켜서 제도하고 싶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조단조직과 훈련법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다.

이러한 그의 포부는 대각 직후인 영산시기에 잘 나타난다. 구인단원들과 함께 시작한 조단구성과 저축조합, 방언공사, 혈인성사 등 초창기 교단사에 중요한 사건들 속에서 그가 생각한 '훈련법과 교화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이번주는 '대종사의 중생교화'편으로 그가 중생을 교화하는데 중요하게 생각한 '훈련법과 교화단'이 처음 시작된 영산시대를 중심으로 살펴봤다.

첫 교화단 조직

소태산대종사가 1916년 4월28일 대각하자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 40여명에 달했다. 하지만 소태산은 미신과 편견에 빠져있는 우민들을 곧바로 지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 그들은 대부분 일시적 허영심으로 모였고 참된 발원과 규율있는 공부에는 관심이 적은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그들에게 대도정법의 바른 교화가 통하지 않으리란 것을 직감한 것이다.

소태산대종사는 일단 모두 지도할 생각을 바꾸고 그 가운데 특별히 진실하고 신성이 독실했던 김성섭, 박한석, 오재겸, 이인명, 박경문, 유성국, 이재풍을 선택했다. 이 후 중앙으로 송도군을 맞아들여서 첫 구인 제자이자 최초의 교화단을 조직한다.

이후 매월 '삼순(三旬)일'에 예회를 보는 모임을 정하여 이를 어긴 자는 상당한 벌이 있게 했다. 또한 〈성계명시독〉이라는 책을 두어 10일 동안 지낸 마음을 조사해 '청·홍·흑점'으로 조사하여 신성진퇴와 실행선부를 대조하게 했다.

여기서는 최초의 교화단을 조직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지만, 〈성계명시독〉이라는 최초의 훈련법이 있었다는 점도 소태산의 중생교화법에 있어 큰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성계명시독〉은 이후 교단의 공부와 사업을 점검하는 일기법, 신분검사법, 그리고 원불교법 형성의 최초 근거가 되었으며, 이후 십인일단 교화단 활동의 주요 내용을 이루게 되는 '단원성적조사법' 등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저축조합과 방언공사

소태산은 원기2년(1917) 음력8월 '저축조합'을 창설해 단원들로 하여금 먼저 금주·금연과 불필요한 의식 등을 없애며 명절·휴일을 줄여서 특별 노동으로 수입을 저축하도록 장려하는 등 단원들의 생활 혁신 운동을 이끌었다. 저축조합의 저축금을 수합한 후, 첫 사업으로 길룡리 앞 바다의 간석지를 막는 방언공사를 진행했다.

당시 한반도는 일제강점기의 혼란기였고 그중에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는 궁촌벽지로써 경제적으로 매우 척박한 곳이었다. 그 당시 마을 주민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경제적인 호구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소태산의 중생제도'는 말과 글로써 그치는 관념적 도덕이 아닌 그 시대와 지역의 민중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으로부터 제도방편을 베풀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태산은 민중을 지도하기 앞서 그들이 진정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잘 알았고, 이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그것이 곧 '저축조합'과 '방언공사'였다.

원불교 최초교서인 〈불법연구회규약〉이 원기12년에 나온 점에서 문서에 의한 구체적인 훈련법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지만 저축조합으로 '근검절약'과 '공동출역'을 통한 생활혁신을 훈련시켰다. 또한 방언공사를 통해 영육쌍전, 신심반조, 사업역량, 복록의 이해, 솔성하는 법 등의 훈련을 시키는 것이 소태산의 본의였다.

이는 '저축조합'과 '방언공사'가 당시 민중을 사실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도덕 훈련법이며 동시에 교화단은 이 훈련의 구심점이 흩어지지 않게 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태산이 민중의 삶 속에서 그들의 눈높이로 시작한 '저축조합'과 '방언공사'가 현실 속에서 '훈련법'과 '교화단'이 구체화되고 사실화될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단원기도와 법인성사

방언공사를 마친 후, 소태산은 구인단원의 기도를 지시했다. 단원들은 음력 3월26일부터 매 삼육일(매월 음력 6일, 16일, 26일)을 정하여 각각 지정한 방위와 봉우리에 따라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소태산은 단원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어떠한 사심도 용납하지 않고 음력 7월26일을 최후 희생일로 정하고 더욱더 정성을 다하게 하였다. 마침내 당일 '사무여한'이라는 최후 증서를 써서 각각 백지장을 찍어, 법계에 올리니 단원들의 일호 사심이 없는 정성이 백지혈인의 이적으로 나타났다.

'혈인성사'는 회상 창립에 있어서도 대단한 의미가 있으나 '대종사의 중생교화'에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것은 '훈련법'과 '교화단'에 의해 9인 단원의 교화가 성공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전〉 법위등급에 비추어 보면 첫 교화단을 조직할 때 단원들은 소태산의 방편을 보고 따르다가 그에게 귀의하는 정도의 보통급 수준이었다. 그러나 '혈인성사' 때의 단원들은 법위등급 '출가위' 조항처럼 '원근친소와 자타의 국한을 벗어나서 일체생령을 위하여 천신만고와 함지사지를 당하여도 여한이 없는 사람의 위'가 되었다.

이로써 소태산은 9인 단원을 중생에서 부처로 제도하는 교화 실적을 얻음과 동시에 '훈련법'과 '교화단'이라는 교단의 핵심 교리와 교화 방법의 근간을 갖추게 된다.

훈련법과 교화단의 변화

이후 '훈련법과 교화단'은 소태산의 열반,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등의 역사적 큰 사건들에 의해 많은 변화를 겪게 됐다.

〈불교정전〉 편찬 이후로 정리된 교리와 훈련법 내용은 보다 명확해졌으며 어느 누구라도 쉽게 배우고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시대 변화와 교세 확장, 법회의 변화 등으로 인해 소태산이 그 지역 특수성과 개인 근기를 염두하며 '구전심수'로 이뤄졌던 영산시대 모습의 훈련법과 교화단은 찾아보기가 어렵게 됐다.

이는 무엇보다도 산업사회를 거치는 동안 농촌 인구가 줄어드는 반면 도시 인구가 급증하게 되고, 사회의 생활 패턴이 농업사회 중심에서 산업사회 중심으로 이동됨으로써 교단의 교화 방식도 자연스럽게 시대 흐름에 따라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오늘날 대다수의 교당들은 일요일 법회가 이뤄지고 설교와 의식집례가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됐다.

그러나 '법고창신'이라는 말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 '소태산의 중생제도' 본의를 살리고 오늘날 현실에 기반한 효과있는 '훈련법'과 '교화단'을 연구개발해야 할 것이다.

이는 적어도 영산시기의 '훈련법'과 '교화단'은 시대와 민중에게 있어 적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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