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은 에고에서 의문은 참 나에서 생기는 것

"저 하늘은 얼마나 높고 큰 것이며, 저렇게 깨끗한 하늘에서 바람과 구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7살 어린 아이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계속되고, 나중에는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라는 질문에서 결국 꽃피는 4월 우주의 본래 이치와 인간만사를 대각하게 됐습니다.

다른 종교에서 교조의 생일을 기념일로 하는 것과 달리 원불교에서는 대각개교절을 최고의 경축행사로 다루고 있습니다. 깨달음이 곧 정신의 생일임을 강조하며 이 날을 전 교도의 공동생일 잔치로 하고 있습니다.

나이 들었다고, 머리 나쁘다고, 교당에 와서 맘 편히 쉬고 싶은데 공부시켜서 힘들다고 투정하는 교도들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 원불교는 공부를 시킬까요? 진리는 의문을 가져야 깨달음을 얻고, 알아야 바른 실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소태산대종사께서는 '의(疑)라 함은 일과 이치에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함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이라고 밝혀 주셨습니다. 반대로 불신은 믿지 아니하는 것을 말하며,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결정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밝혀 주셨습니다. 사용하기에 따라서 달라지지만 의심은 부정과 불신에 바탕해서 나타납니다. 밑도 끝도 없이 부정적인 망상의 연속으로 여우처럼 의심한다고 호의라고 하며, 결국 바른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같은 의심이지만 이것이 믿음에 바탕한 바른 의심은 의문이라고 합니다. 알고 싶다는 강력한 열망을 긍정적으로 표출해 창의적으로 탐구하고 질문하고 관찰하고 통찰하여 결국 지혜를 얻고 확신을 하게 됩니다. 의심은 에고에서 생겨나고 의문은 참 나에서 생겨납니다. 의심의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질문을 던지고 탐구해야 합니다.

참 나는 무엇인가? 삶은 무엇인가? 우주는 무엇인가? 왜 그럴까?

오히려 의문을 갖지 않는 삶은 집착과 편견, 오만과 맹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깊게 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은 후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나는 오늘 내 앞의 상대를 '의심'하고 '불신'하며 살고 있는가?
일과 이치 간에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며 살고 있는가?
아무 생각 없이 당하는 대로 그냥 습관처럼 살고 있는가?

내가 갖고 있는 '의문'이 어떤 종류와 방향성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내가 얻는 것의 내용 또한 달라질 것입니다.

소태산대종사께서는 이 삶과 우주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놓지 않으신 결과 무궁한 묘리와 무궁한 보물과 무궁한 조화를 얻으셨습니다.

<삼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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