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길 교무/시카고교당
나는 성지인 영산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아름다운 산과 들 그리고 작은 시냇물들이 흐르는 시골에서의 유년기에 지워지지 않는 한 토막 순간이 있다. 아직 초등학교도 다니기 전인 어느 날 노루목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지난 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난생 처음 뚜껑이 없는 트럭을 타고 영산성지로 들어가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바로 대산종사께서 보위에 오르시어 영산을 방문하신 날이었음을 훗날 알게 됐으니 그때가 대산종사를 처음 뵙게 된 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 익산으로 이사를 오게 됐고, 아련한 기억 속에 금강리로 대산종사를 뵈러 가면 어른들께서 '도인이 되려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춰야 한다'고 하셔서 노래 부르고 덩실덩실 춤을 췄던 기억도 난다. 이런 유년기를 지나 청소년기에는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때론 신도안으로 배알 가는 일이 많았다. 대산종사를 뵙는 시간에는 많은 총부의 원로 스승들이 함께 했다. 당시 거의 전무출신 자녀들이었던 학생들은 배알 할 때마다 공식적인 절차로 자기소개를 하는데 꼭 누구의 자녀인지를 밝히며 인사를 드렸었다. 함께 간 친구들의 부친들은 거의 교단 요직에 있지만 아버지는 편찮은 관계로 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린 내게 그 시간은 참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항상 맨 나중에 내 이름을 말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말했는데, 대산종사께서는 그런 나를 특별히 챙기며 "너의 아버지는 참 훌륭한 전무출신이시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그 뒤로 뵈올 때 마다 이름을 불러 주시고 아버지의 근황을 살피시며 관심을 가져 주셨다. 그래서 대산종사를 뵙는 시간이 더욱 행복했다.

고등학교 2학년, 신도안 삼동원에서는 역사적 모임이 있었다. '원족회'라는 이름으로 전무출신 자녀들이 모여 처음으로 훈련을 하게 했는데, 이때 '원친회'라는 공식친목 단체를 만들어 주셨다. 만약 대산종사께서 휴무 전무출신이셨던 아버지에 대한 관심을 가져 주시지 않으셨다면 직함 없는 아버지의 상황에서 나는 그 자리에 참석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당하고 기쁘게 그 자리에 함께 하여 전국에서 모인 원친회원들과 서원을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됐고, 그 후 훈련을 통해 한 가족으로 자리매김을 하도록 길을 열어 주셨기에 나는 지금도 '원친회'에 대해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대산종사의 대자비의 품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나는 운명적으로 전무출신의 길을 향해 가고 있었고 서원의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해주셨다.

생각해보면 당시 원불교학과 학생들은 참 행복자였다. 대산종사를 모시고 거의 매일 열리는 송대 야단법석에 참여했고, 방학에는 신도안에 달려가 서용추, 동용추로 따라다니며 법문을 받들었고, 외부의 손님이 오면 어김없이 대산종사의 부름을 받아 노래를 부르던 우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

어디 그것뿐이던가. 우리 66동이 불맥학년이 3학년 봉사활동으로 제주도에 갔을 때 우리들 얘기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종법사에 대한 대화를 들은 마을 청년이 직접 가꾼 파인애플 중 제일 좋은 것으로 골라 주며 "너희들의 스승이신 종법사께 올려 달라"하여 봉사활동을 마친 후 제일 먼저 삼동원으로 달려가 드리고 봉사활동 기쁨을 전하던 일들이 가슴 저미는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대산종사께서는 그렇게 항상 가까이 우리 곁에, 아니 내 곁에 계셨다. 해마다 바뀌는 많은 서원관 학생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해 주셨고, 스승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셨다. 그래서 아직 학생이지만 교단 안에 존재하는 자부심을 갖게 해 대서원으로 대불과를 이루어 대봉공인이 되도록 이끌어 주신 스승이셨다.

수많은 교단사와 격동기의 한국사, 그리고 열려가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 주세교단으로 이끄시느라 얼마나 바쁘시고 힘이 드셨을지 생각될 때마다 얼마나 큰 사랑을 주셨는지 흐르는 세월 따라 더욱 깊어지고 절절해 진다. 원불교100년을 목전에 둔 요즈음, 수십년 전부터 공부하라 내려주신 교단백주년 의두요목과 기원문결어를 아침마다 외우며 '무등등한 대각도인, 무상행의 대봉공인' 되라고 부촉해주신 간절하신 염원을 이루는 대보은자 되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되어지는 그날까지 마음 다하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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