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평등히 대접해주시는 어른

▲ 심홍제 교무 / 워싱턴교당
원불교학과 입학하면서부터 대산종사를 늘 가까이 뵐 수 있었음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홍복이었다. 아무 철이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대산종사는 크게 소탈하시고 할아버지처럼 친근하신 어른이셨다.

총부에 주재하고 계실 때는 구내를 둘러보시다가도 영모전 광장에서 운동하며 뛰놀던 우리에게 지팡이를 흔들어주시며 기운을 보내주셨다. 우리가 가끔 알봉묘지에 바람을 쐬러갔다가 만나뵙게 되면 돗자리를 깔고 노래도 부르고 율동도 선보이며 재롱을 피울 때 함께 오신 어른들과 웃고 박수쳐주시며 한집에 계시는 할아버지 같이 편안하게 대해주셨다.

그래서 종법사님이 어떤 어른이신지, 어떻게 모시고 받들어야 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마냥 할아버지 같은 분으로 생각하며 지냈다.

늘 좌우로 법동지를 모시고 사시는 어른이셨다. 법문을 하실 때는 늘 소태산대종사, 정산종사께 맥을 대시며 그분들의 심법을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어느 자리에 임석하셔도 좌우로 든든한 보좌불이신 성산·형산·향산·용타원종사 등 많은 분들과 함께 하셨다.

법문을 하실 때는 늘 "성산 안 그런가? 형산 그렇지?"하시며 물으시고 다짐하시며 법자리를 더욱 훈훈하게 해주셨다.

모두를 평등하게 대접해주시는 어른이셨다. 학생 때 가끔 왕궁 조실에 가서 뵐 때면 언제나 다과를 내주시게 하시는데 배 한 쪽과 사과 두 쪽을 각각 개인 접시에 담아 내주시면 대접받은 기분이 들어 참 좋았다. 아이들이 오면 아이들 좋아하는 것을 미리 준비케 해주시고 또 수시로 찾아오는 재가 출가교도, 혹은 정계 재계 인사들에게 법복을 입히고 사진을 함께 찍어주시며 모두 다 환대해 주셨다.

까닭 있게 공부심으로 사는지 늘 점검해주신 어른이셨다. 원기68년 3학년, 겨울방학에 오은도, 이귀인 교무와 함께 대산종사 단기 시자로 신도안 삼동원에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청소와 빨래 등 배당받은 일들을 하고 대산종사 가시는 곳에 따라다녔다. 시시때때로는 탁구도 하고 밤이 되면 삼동원 식구들과 모여 앉아 회화도 했다. 나는 대산종사께서 즐겨 마시는 차를 한잔 달라고 해서 어른의 차 마시는 흉내를 내었고 모여 앉은 사람들이 어찌나 웃었던지 조실에 근무하는 교무가 "종법사님께서 '쟤들이 왜 저렇게 웃는지 가보고 오라'하셨다"며 온 적도 있었다. 눈이 오는 날은 조실 방에 대고 "종법사님, 눈이 와서 참 좋아요. 함께 사진 찍게 나오세요"하면 조금 후에 겨울 외투를 입고 나오시어 함께 사진도 찍어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어찌나 철부지였던지…. 그러나 낮에 각처에서 손님들이 오시면 수시로 "정기일기 발표해 봐라. 감상담 해 봐라"하셔서 그분들 앞에서 발표하면 "잘했다. 박수쳐라"하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조실 근무 후 남중교당에서 남은 방학기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 일기장을 우편으로 부치라고 하셔서 보내드린 적도 있었다. 일하고 놀고 웃고 지내면서도 까닭있게 공부심으로 사는지 늘 점검해주신 것 같다.

대산종사는 비닐하우스 속에서 근검절약을 실천하시며 만 중생을 품에 안으시고 모두를 부처 만들고자 곳곳에 훈련원을 건립하시며 33년간 교단을 이끄셨다. 그 큰일을 하시면서도 일상생활 속에서 소리 없이 행해주신 대포무외 세입무내의 운심처사하심은 철없던 내 마음에 깊이 스며들었고 흉내라도 내며 사는 표준이 되어주신 스승이셨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대산종사께서 종교연합운동 UR을 제창하시고 그 일을 실현할 수 있도록 UR교당(현 맨하탄교당)이라 지칭해 주신 교당에서 그 뜻을 실현시켜드리고자 심혈을 기울이는 이오은 교무를 보좌하며 9년을 살았다.

그리고 시카고 교당 근무 12년 동안 일생을 대산종사께 신성을 바치고 보은하는 심경으로 살으셨던 숨은 도인 김양수 종사와 함께 교화하고 공부하면서 대산종사께서 참으로 멋있는 여래이셨음을 온전히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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