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효과는 신심으로 이어져

교무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도반과 함께 총부에 들른 적이 있었다. 무심히 대종사성탑에 가서 대종사를 만나고 오겠다고 하는 내게 도반은 '성탑에 찾아가서 신심을 세우는 것은 학생때나 하는 것이다'며 '아직도 성탑이나 스승님을 눈으로 봐야지만 신심이 나는 거냐, 지금쯤은 찾아뵙지 않아도 신심정도는 이미 마음에 세워져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한 소리를 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도반의 핀잔의 소리는 마음에 충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질 때마다 경책이 돼 다시 정신을 차리게 하곤 했다.

해외교당에 근무하고 있을 때, 더 많은 부분 자력이 필요함을 느꼈다. 마음속에 자리를 잡는 것은 허허로움으로 채워지지 않는 이 법에 대한 갈증과 스승님들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해외에 나갈 때 종법사께서는 간곡히 그곳에 뼈를 묻으라는 말씀으로 보냈는데 3년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들 중 하나가 바로 스승들의 법에 흠뻑 젖고 싶은 것이었다.

지금은 해외에서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스승 가까이 다가와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찾아 뵐 수 있는 거리이지만 현 부임지의 여건상 그렇게 원하는 만큼 스승들을 가까이 찾아뵙지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많이 아쉽고 죄송스런 마음으로 여전히 스승들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전과 같이 찾아뵙지 않아도 내 신심 전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동안 스승들께서 구전심수로 알려준 정법으로 사실적인 공부를 하며 재미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도들에게도 그대로 구전심수의 이 법으로 거듭나게 해주고 싶은데 그것이 만만치 않다. 늘 반복되는 삶에서 밖으로 세상의 즐거움을 쫓으려는 교도들과 법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밀당을 하면서 신심나게 해주려고 무척 노력하고 있다.

대종사께서 이 회상을 펼칠 수 있었던 자원은 초창기 목숨을 내 놓고 신심을 바쳤던 구인선진들의 혈성과 신심을 보여준 선진들의 그 신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교도들의 신심을 내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문답 감정을 꾸준히 하는 교도들만큼은 원불교 공부법이 최상의 공부법임을 자신하고 교도로서의 자긍심이 있다. 이는 직접 법을 자신의 생활에 활용해서 효과로 나투어지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신심이 나는 것 같다.

법으로 진급이 되고 은혜를 입고자 공부하는 교도는 세월이 흐를수록 신심이 깊어진다.

그러나 이 회상에 어렵게 찾아와서 그저 인연만을 쫓는 교도는 쉽게 신심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게 되면 등을 돌리고 만다. 어느 세월에 진급이 되고 생사자유와 윤회해탈의 공부를 할 것인가. 영겁다생에 물러나지 않을 신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스로 생활속에서 법을 찾고 생활 속에서 법을 사용 할 줄 아는 자력이 있어야 한다. 모두의 마음에 영겁으로 일관할 진리의 힘이 되어줄 스승을 모시길 염원해 본다.

포천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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