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순례, 11세 대산을 만나다

25일은 대산종사탄생100주년 기념대법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이에 발맞춰 '대산종사 탄생100주년을 기리다'는 기획을 마련, 성자의 발자취를 찾아간다. 1주는 탄생가에서 초선지까지 도보 순례, 2주는 주석했던 원평 지역과 신도안, 완도, 3주는 대산종사 칸타타 공연실황 지상 중계, 4주는 기념대법회 현장을 생생하게 담아낼 예정이다.
▲ 봉황산에서 바라본 만덕산 성지.
청수신앙, 안채 뒤 거북바위

좌포교당에 도착하자 문화해설사인 문정교당 이정명(68) 교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법당에서 4배를 올린 후 대산종사의 성적지 순례를 시작했다. 마침 오후에 바쁜 일정이 있었지만 좌포교당 박법종 교무도 도보순례에 함께했다. 좌포 대산종사 탄생가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터, 아래채 터 등으로 조성돼 있다. 다만 최근 중수를 통해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다.

1914년 4월, 부친 연산 김인오 대희사와 모친 봉타원 안경신 대희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대산종사는 좌포 탄생가에서 초년 시절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순례객의 눈길을 끄는 곳은 다름 아닌 거북바위(일명 시(侍)바위). 안채 뒤 뜰에 있는 거북바위는 대산종사의 탄생과 연관이 있다. 모친 안경신 여사가 자녀를 낳지 못하자 시어머니인 노덕송옥 정사와 함께 8년 동안 청수를 올려 기도했던 곳이 거북바위다. 결국 장녀를 낳은 후 10년 만에 대산종사를 얻게 된다. 원기24년 대종사가 좌포 탄생가에서 머물 때 이 돌을 보고 '마이산 돌과 같아 그 정기가 통해 있다'고 언급할 정도로 영험한 바위다.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해 보이지 않았지만 대대로 이어져 오던 청수신앙의 정성은 죽은 바위마저 영험하게 만들었다.

기자의 눈에 띈 것은 거대한 쌀뒤주다. 옛터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해 관리되고 있지만 규모가 꽤 커 보였다. 쌀뒤주는 보통 나락(쌀)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여 그 집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쌀뒤주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옆은 돌담길이 조성돼 있다. 이 돌담길을 '신도안 돌담길'라고 부르고 있다.

그 연유를 박 교무에게 묻자 "대산종사는 신도안 훈련원 주변에 1.4km의 돌담길을 쌓았다. 그곳에서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돌담을 보면 생각날 것이다"고 말해 기자의 이해를 도왔다. 스토리텔링의 요소를 곳곳에 넣어 순례객들의 감성을 높이고 있다는 느낌이다.

탄생가 순례를 마치고 이동한 곳은 마을 앞에 있는 김봉배(대산종사의 증조할아버지 형제)의 효자문이 있다. 효자문은 집안에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어명으로 조성된다는 점에서 가문의 효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봉황산에 오른 후 달길천을 걷다

등산화 끈을 고쳐 매고, 본격적인 도보순례에 나섰다. 일행은 탄생가 뒤편 큰 도로를 넘어 봉좌마을로 향했다. 봉좌마을은 봉황산 아래 마을로 탄생가와 매우 가까이에 있다. 마을 끝 밭을 따라 다가보면 정신개벽산악회가 표시해 놓은 노란천이 보인다. 노란천이 안내하는 곳으로 천천히 산을 오르자 어느덧 좌포리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소가 나왔다. 주변에는 최근에 조성된 분묘가 있는데, 좌포교당 종지기로 20여년을 봉사했던 신심장한 교도가 묻혀있다고 박 교무가 설명했다. 그 덕분인지 큰 나무들이 잘려나가면서 마을 조망을 탁 트이게 했다. 위에서 바라본 좌포 탄생가는 앞산 창고지기산과 오른편에 알미산이 보였고, 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오암천도 뚜렷했다.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물이 좌포리를 지나 하동 남해로 흐르는 것이다. 왜 좌포가 명당인지는 봉황산에 올라봐야 안다.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명당 풍수지리를 가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봉황산과 알미산 사이에 큰 길을 내 혈맥을 끊었다는 노루목도 있어 지명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시원한 전망을 바라보며 준비해 온 간식과 물로 휴식을 취해 본다. 봉황산 뒷면은 마을에서 느끼는 장대함보다는 밭으로 개간돼 있어 어느 고랭지 채소밭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차량으로도 접근이 가능하다. 그곳의 큰 정자나무는 순례객들의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사실 봉황산은 좌포마을과 만덕산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라 도보순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정자나무를 뒤로 하고 만덕산으로 가던 발길을 재촉하자 달길천이 나왔다. 하지만 달길천은 하천공사가 한창이었다.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샛길로 이동해 천변을 걸었다. 현재 곳곳이 이런 형태로 하천공사가 끝나야 제대로 된 도보순례길이 완성되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 닭 사육장을 지나고 있다. 사람의 후각은 특히 예민해서 느끼는 강도가 남다르다. 그런 면에서 도보순례의 첫 난관은 닭 분비물의 냄새였다. 기분 좋게 걷던 순례자를 약간 언짢게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금세 봄의 새록 새록함이 천 주변에서 묻어 나온다. 쑥이며 잡초들이 온갖 교태를 부리며 순례객을 환영했다. 듬성듬성 찔레가 보여 옛 생각에 하나를 꺾어 보았다. 껍질을 벗겨 맛을 보니 옛 맛 그대로다. 여린 찔레가 억세지 않아 먹기에는 참 좋았다. 하천공사로 수초며 고즈넉한 분위기는 사라졌지만 그런대로 걷기에는 편안한 길이다. 오암마을에 당도하자 벽화들이 순례객을 반겼다. 개성있는 벽화는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 같았다. 공사 구간을 피해 밭으로 조금 오르자, 아주 익숙한 도로가 나왔다.

1차선으로 쭉 뻗은 그 길은 차량통행이 한산해 걷기에 나무랄 데가 없었다. 이윽고 도달한 달길마을, 길은 언제나 예기치 않는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때마침 고향을 방문한 아중교당 이경봉 교도회장 부부가 우리를 보고 반갑게 맞이해 줬다. 4월이지만 더운 날씨에 얼굴은 홍당무가 돼 붉게 달아올랐다. 총 8km 정도를 예상했던 도보 길 중 가장 난코스가 눈 가까이에 와 있다.
▲ 대산종사 탄생가에서 만덕산 초선지까지 도보순례길.
불당골 초선지, 11세 대산종사는

대산종사 11세 때 '대포 만드는 사람 보러 간다'고 따라 나선 길. 교단 3대 여걸 중 한명인 삼타원 최도화 대호법의 인도로 생불(生佛)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적어도 3명 이상이 함께했을 것으로 보인다. 원기9년 5월 대종사와 12명의 제자가 한 달 동안 선을 나기 위해서는 쌀과 부식 등을 준비했을 것이다. 노덕송옥의 약속된 후원을 통해 만덕암(초선지)에서의 초선을 기획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어린 대산종사가 걸었던 이 길은 여럿이 함께 걸었다고 볼 수 있다.

중길리교당을 지나 만덕초선지 비가 있는 삼거리에 도착하자, 만덕산훈련원 이원우 교무가 우리를 반겼다. 불당골 길 안내를 위해 기다린 것이다. 산길은 하천길, 들길에서 맛 볼 수 없는 재미가 더 있다. 주변의 산나물과 아름드리나무, 신록의 연초록이 뻐근해 오는 심신을 위로해 줬다. 11세 대산종사는 달길천 길에서 무더운 날씨에 물장구도 치고, 쉬면서 쉬엄쉬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산길에 접어들었을 때는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을까. 성인인 순례객들도 가파른 불당골에 숨이 가빠왔다.

드디어 3시간을 걸어서 당도한 초선지 터. 이곳은 만덕암 터와 초막 터가 있어 일대를 초선성지라 부른다. 현재 초막 터에는 한옥으로 된 원불당(작은 법당)이 자리하고 있다. 도보순례를 마친 이정명 교도는 "오늘처럼 순례를 한 것은 처음이다"며 "힘들고 험한 산길을 걸어서 올라 왔지만 선진님들의 심정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특히 걸음걸음을 11세 대산종사의 심정으로 함께해 보람됐다"고 감상을 털어놓았다.

올레길이다, 마실길이다 하여 걷기열풍인 지금, 우리만의 소중한 자산을 도보순례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 11세 대산종사는 왜 이 길을 걸었을까. 할머니의 손을 잡고 따라 나선 이 길, 걸으면서 스스로에게 수많은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대산종사 추모 순례코스는 좌포 일대를 비롯해 왕궁상사원까지 기획돼 있어 교도라면 누구나 순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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