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를 진리에 맡긴 곳, 원평을 다시 걷다

오는 25일은 대산종사탄생100주년기념대법회가 열린다. 이에 발맞춰 '대산종사 탄생100주년을 기리다'는 기획을 마련, 성자의 발자취를 찾아간다. 1주는 탄생가에서 초선지까지 도보 순례, 2주는 정양과 주석했던 원평, 3주는 대산종사 칸타타 공연 지상 중계, 4주는 기념대법회 현장을 생생하게 담는다.
▲ 원평 구릿골 금평저수지에서 선정에 든 대산 김대거종사.

햇살 좋은 봄날, 대산종사의 치열했던 적공 현장인 원평 구릿골을 황직평 원로교무, 주성균 교무와 함께 순례했다. 생사를 진리에 맡긴 구도의 자취를 새기며 촘촘히 걸었다.

원평은 제일 좋은 곳, 제일 좋은 때

대산종사의 20대는 무서운 정진과 깨달음의 연속이었다. "내가 스무 살 때 일월이 합치되는 상서로운 꿈과 더불어 신명(神明)이 솟았으나 큰 지혜가 솟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더욱 보림하고 적공하였느니라. 그 후 17년 만에 원평에서 다시 또 마음이 밝아졌으나 그 지혜를 감추고 더욱 연마하였느니라."

황 원로교무는 "꿈을 꾼 그날 아침, 대종사께서 대산종사를 일찍부터 불러 '이제 법 가지고는 걱정하지 말라'하시어 그 후부터 더욱 존절히 수행에 몰두했다"고 구술했다.

대산종사는 30세 되던 해, 대종사 열반상을 치르고 보화당에 근무하던 김서룡 선생을 간호하다 그만 폐결핵에 전염되고 만다. 이 때 황정신행의 주선으로 양주 장포동을 정양지로 삼고 5개월 이상 식사도 못하며 병마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의사의 처방대로 밥 한 공기를 하루 세 때 나눠 먹으며 선보를 통해 건강을 회복했다. 황 원로교무는 대산종사가 당시 찬장 위에 놓인 밥공기를 보며 "내가 그때 공부 참 많이 했다"고 자주 말했음을 떠올렸다.

대산종사는 양주와 원평에서 요양할 때가 '제일 좋은 곳, 제일 좋은 때'라 했다. "내가 큰 병을 얻어 양주에서 요양을 할 때 선보로 산행을 했는데 처음에는 5분도 제대로 걷지 못했으나 7·8개월이 지나자 갔다 온 줄도 모르게 다녀 왔느니라"고 전한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극한의 고통속에 원기31년 글이 솟았으니 바로 '대원주(大圓呪)'다. 크고 두렷한 기운을 함양하여 / 걸음걸음이 삼계를 뛰어넘고 / 크고 두렷한 기운을 함양하여 / 생각 생각이 중생을 제도하게 하소서

해방과 함께 주산종사는 전재동포 구호사업을 펼치다 40세 젊은 나이에 열반했다. 대산종사가 그 뒤를 이어 사무소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재계와 정계의 주요 인사들과의 깊은 교분을 갖고 외교에 진력을 다하던 중 대산종사의 병은 다시 재발되고 만다. 또 다시 닥친 병마에 의사는 더이상 살아 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정산종사는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원평에 가서 요양하도록 명하니 대산종사는 그 길로 원평으로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생명을 진리에 맡기고 오로지 서원으로 이어갔다. 원평은 대산종사에게 그런 곳이었다.

대소요 해탈의 삶

대산종사는 곧 병들어 죽을망정 망태 하나 짊어지고 온종일 산천을 걸었다. 다시 시작된 생사의 기로에 선 대산종사는 발 한 걸음 떼기가 어려웠다. 오늘도 내일도 늘려간 걸음이 나중에는 80리 길을 다녔다. 스스로 약속한 시간이 되면 아무리 많은 약초를 발견해도 어김없이 하산하는 등 철저히 일과수행에 공을 들였다.

늘 초라한 옷차림에 모악산, 구성산, 제비산, 금산사, 귀신사, 학선암, 청련암을 돌고 또 돌았다. 그 때 떠오른 시가 있으니 '천년고사일등명'이다. 천년 옛 절에 한 등이 밝은 데 / 노승이 한가로이 앉아 물소리를 듣더라 / 마도 공하고 법도 공하고 공 또한 공하여 / 마음도 맑고 경계도 맑고 꿈 또한 맑도다.

황 원로교무는 "그 당시 대산종사는 완전히 거지처럼 하고 다녔다고 했다. 정신기운이 남 달라 따라오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자 온전한 정양과 수행에 방해가 됐다. 그래서 초라한 행색을 하고 돌아 다녔다"고 구술했다.
▲ 대산종사 정진문.
〈대종경〉 편수와 수많은 오도송 쏟아져

원평은 대산종사가 〈대종경〉 초안을 잡는 등 교재편수의 연지다. 그래서 스스로 '법생지(法生地)'라 말했다. "내가 원평에서 약을 캐며 기도할 때 신령스러운 문구가 솟아나 글을 써 보니 과거의 문장가보다 못할 바가 없고, 중앙총부에서 붓글씨를 써 보니 옛 명필보다 못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때 한 생각 돌려 글 문을 닫고 붓을 던져 쓰지 않았나니, 내가 잘하는 데 치우치지 아니하고 함축하였기에 뒷날 〈대종경〉을 정리할 수 있는 힘이 솟았느니라."

36세부터 38세까지 3년간 원평에서 정양하며 대산종사는 '채약송', '무실무득', '원상대의', '정진문', '금산사에서' 등 법문을 쏟아 낸다. "내가 깊은 병으로 원평에서 요양 중일 때 '천하가 나를 버리더라도 생사는 진리계에 맡길 뿐 수만 겁을 통하여 이 회상을 떠나지 않으리라. 나에게 큰 병을 준 것은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니 오직 진리를 믿고 대종사의 일원대도를 받들며 언제든 스승의 큰 뜻을 천하에 펼치리라'하는 서원과 신심을 가지고 살았노라."

당시 금산사 교무스님이던 소공이 "원불교는 사판승이 많아 공부하는 도인이 없다"고 말하자 대산종사는 "내가 지금부터 글을 한번 부를테니 받아 써보라"하고 적어 내려 간 글이 바로 '정진문'과 '원상대의'다. 훗날 〈대종경〉 초안은 한국전쟁 때 유실됐다가 김법진 교무가 찾았으며, '정진문' 등은 서세인 교무가 우연히 발견해 대산종사께 올렸다고 전해진다.

동곡(銅谷)마을, 구릿골

대산종사는 원평교무로 발령받은 유현정 교무에게 "네가 좋은 곳으로 가는 줄 알고 가느냐? 대종사께서 변산으로 들어가시기 전 방언공사 끝마치시고 팔산 대봉도와 같이 금산사 뒤 송대에 수개월 계시면서 그 곳에 최초로 일원상을 그려 안거하셨다. 정산종사께서 구도구사(求道求師)차 처음 오시어 머무르신 곳이 대원사이고, 진묵대사께서 대각을 이루시고 머무르신 곳이 여기며, 강증산선생께서 삼십세에 대각을 이루신 곳이 이곳이다. 성인들은 일맥상통하신다"고 말했다.

법문과 같이 제비산 자락 구성산(九聖山)이 있는 이곳은 증산선생이 천지공사를 벌인 '동곡약방'과 관련 시설들이 즐비하다.

'구릿골'의 원래 명칭은 '그릇골'이다. 오래전 그릇 굽는 가마터가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그릇골이 구릿골로, 다시 동곡으로 변천했다. 대산종사가 30대 정양했던 곳은 수몰됐고, 현재 원심원 윗집 허름한 집을 대산종사는 유독 선호하여 그곳에 숙소를 정했다. 지금도 100년이 넘은 감나무와 맑은 기운이 감돌아 이곳이 정양지임을 느끼게 한다.

원평 교화이야기

88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올림픽 유치에 고민이 컸다. 조실을 찾아온 조상호 올림픽위원장에게 대산종사는 염주 하나를 건넸다. "이 염주를 계속 돌리며 회의에 임하고 사람을 만나라, 그럼 반드시 될 것이다"며 그에게 희망을 심어줬다. 유치 후 조 위원장은 다시 원평을 찾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그때 받은 염주를 꺼냈다. 그런데 그 염주알이 깨져 있었다. "대산종사 하명을 받고 수없이 염주를 돌리다 그만 깨졌다"고 그는 말했다.

'평화할머니' 일화도 유명하다. 주성균 교무는 다음과 같이 구술했다. 원심원 뒷집에 기거하는 한 할머니가 말하길 "옛 어른들이 이곳 구릿골에 비행기 타고 성인 한분이 오실 것이라고 해서 그분을 기다렸는데, 검은 자동차를 타고 내리는 대산종사를 뵙고 그 성인이 바로 대산종사임을 알았다"며 평생 기도하며 모은 동전 바구니를 대산종사에게 올렸다. 대산종사는 "일생을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원력을 세웠으니 법명을 '평화'라고 해라" 하여 그 뒤부터 그는 '평화할머니'라 불리게 됐다.

원심원과 원평교당

원심원 서용덕 교무는 "이곳은 대산종사께서 오랜 기간 정양과 적공을 하신 터라 기도와 선도량으로 활용되면 좋겠다"며 "적공에 뜻을 둔 이들이 힘을 탈 수 있는 순례지가 되도록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릿골 순례를 마감하고 원평교당을 방문했다. 예상치 못한 방문임에도 반갑게 맞이해 주는 김도천 교무와 서도명 교무.

김 교무는 "대산종사께서 머무셨던 조실과 교도들을 접견한 동인장 건물이 잘 보존돼 있다"며 "이곳 원평교당에서 수많은 전무출신과 호법동지가 배출됐다. 어린이교화와 세계평화를 염원한 대산종사의 경륜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대산종사의 마음의 고향이요, 대교화지였던 구릿골과 원평교당, 대산종사탄생100주년을 맞아 교도들이 순례를 통해 대산종사 적공의 역사를 체험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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