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덕관 교무/양정교당
처음 전무출신을 하려고 마음먹고 이성각 할머니와 은자녀를 맺고 원광여고를 다니게 됐다.

출가하려는 사람들은 방학 때면 대산종사 계시던 금강리로 인사를 갔는데 그 때 첫 인연을 맺고 출가식 이후 첫 근무지로 조실에 발령을 받아 시봉진으로 받들게 됐다.

그런데 동지들이 '손님접대를 안 해 본 네가 어떻게 조실에 근무하겠냐'고 말해 겁도 나고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황직평 교무에게 여쭸다.

"저같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도 조실에 근무할 수 있냐"고 물으니 웃으면서 "다 잘하면 싸워서 안 돼.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과 어린 사람이 같이 근무하게 한 것이다"고 말했다.

모르는 것이 많아 첫해 1년은 무척 힘들었다. 당시 조실에는 벨을 울려 시자들을 부르곤 했다. 그런데 내 방 벨이 울려서 가면 '핫바지 가져와라, 핫저고리 가져와라' 하셨는데 나는 핫바지가 뭔지, 핫저고리가 뭔지 알 수가 없어 곤혹스러웠다. 또 손이나 몸짓으로 말씀하시면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몰라 같이 근무하는 교무에게 물어서 올리며 근근이 이어 갔다.

어느 때는 법문을 받아 적으라고 하시는데 한자를 받아 적기 어려워 땀을 흘리고 있으면 '됐다, 가라!'하실 때 너무 죄송하고 몸 둘 바를 몰랐던 적도 있었다.

심란할 때 대산종사께 '1년만 근무하겠다'고 말씀드리려 마음먹고, 벨소리를 듣고 들어가면 "오늘 서울 교도들 좋아하고 가셨냐?"하며 여러가지 묻는 말씀에 대답하다 보면 사심잡념이 다 녹아나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때 '성인의 옆에만 있어도 업장이 다 녹아 난다'는 말씀을 실감했다.

또 신도안은 재래식 아궁이라 매일 군불을 때야 하는데 하루는 흐린 날 군불을 때려니까 자꾸 연기가 나고 힘이 들어 나무를 많이 쑤셔 넣고 아궁이 문을 닫고 나와 버렸다. 그러니 나무가 제대로 탈 리가 없었고 매캐한 연기가 가득 조실 방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 대산종사께서 "누가 불을 땠느냐, 똥 같은 놈이 아궁이 문을 닫으면 연기가 어디로 가겠느냐"고 호통을 치셨다. 그 때 내가 얼굴이 노래져 어쩔 줄을 모르고 있으니까 "성국이 네가 가르쳐주지 않아서 그렇지 않냐"고 도리어 옆에 있는 시자에게 호통을 치셨다. 그 후로는 내 마음이 너무 여린 것을 보시고 혼을 잘 안내시고 타이르셨다.

그때 성현들은 그 사람을 봐서 지도해 주심을 느꼈다.

대산종사는 나의 출가 동기를 듣고 "네가 어머니 고흥권의 정성으로 출가했구나. 전무출신 한 사람의 출가 뒤에는 반드시 숨어있는 노력이 있음을 알겠더라. 너는 어머니가 항마도인인 줄 아느냐? 하섬에서 배가 뒤집혔을 때 나는 늙었으니 저 학생들 먼저 건지라고 하며 자신은 맨 끝에 도움을 받았다고 하니 그 일이 어려운 일이다. 참으로 훌륭하다. 네가 어머니처럼 살고 간다면 일생을 마칠 때 출가위는 될 것이다. 너의 어머니가 비록 무식해도 도인이다. 이런 도인이 교단 구석에 많이 끼어 있어야 한다"고 말하셨다. 또한 "대종사께서 내소사 공양주를 여래라고 하셨다. 그 공양주는 더벅머리 총각이었다. 스님들이 네가 머리나 깎으면 어디 가든지 스님으로 모시고 밥은 줄 터이니 머리를 깎으라고 하면 나는 이대로가 좋다고 하며 머리가 많이 길면 잘라 팔아서 경(經) 만드는데 쓰도록 했다. 그가 바로 여래의 화현이었으니 누가 알았겠느냐? 우리 회상에도 그런 인물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법문을 받들테면 내 어깨가 무거워졌다.

특히 대산종사는 "교화를 하려면 1인 1기를 가져야 한다"고 법문을 해주셔서 일생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너는 삼학 중에서 어느 방면이 능하고 어느 면이 부족한가 봐서 능한 면보다 부족한 면에 공을 들여야 한다." 그래서 내가 법문 기록을 많이 하니까 나를 키워주시기 위해서 그러시는지 "학자, 학자다" 하시는 말씀을 많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대산종사를 가까이에서 모시고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사실만으로도 홍복이 아닐 수 없다. 이끌어 주신 은혜에 보은하는 삶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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