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정제 교도/분당교당
나의 서재에는 큰 스승이 내려주신 '동그라미, 대산(大山)'이라고 새긴 목판이 걸려있다. 동그라미는 붓글씨로 그린 것이라 미완성의 일원상으로 보인다.

내가 원불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60년 초, 군대를 다녀와서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에 복학해서 다닐 때였다. 게시판에 그 당시 뛰어난 지성으로 알려진 철학과 박종홍 박사의 '원불교와 종교철학'이라는 강의가 종로교당에서 열린다기에 찾아갔다. 〈원불교교전〉을 뒤적이다가 거북이 모양의 교리도 중앙하단에 제시된 게송에 홀리고 말았다. 그 전에 혼자 공부하고 있던 반야바라밀다심경이 공과 무를 강조하는 바람에 허무에 빠지는 것 같아 회의를 품고 있었는데 '구공(俱空) 역시 구족(具足)'이라는 말에 눈이 뻔쩍 띄었다. 텅 빈 속에 가득 차 있는 그곳이 진공묘유(眞空妙有)의 현상계요, 적멸보궁(寂滅寶宮)이자 대적광전(大寂光殿) 같았다.

그 즈음 원남교당을 찾아갔을 때가 1964, 5년경이니 원불교와 인연을 맺은 지 반백년이 다 돼 간다. 원남교당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행정고시 준비에 전념하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일요일 오전 법회에 참석했고 끝나자마자 다시 도서관으로 향하는 일상을 보냈다. 법회에 참석하는 한 시간 남짓이 정신적으로 휴식을 취하고 보림하는 짬이었다. 그 보림 덕분인지 고시에 합격해 경제기획원에 다닐 때, 송영봉 원로교무의 인도로 청년회와 연합회 활동에 참여했다. 그 뒤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하고 와서 박은국 원로교무를 만났다. 당시 젊은 부부중심의 '부설회'를 만들었고 나는 초대회장의 중임을 맡게 됐다.

부설회 회원은 박 원로교무의 지도 속에 대산종사가 상주하고 있는 신도안에 가서 큰 스승과 인연을 맺게 됐다. 우리들은 처음으로 대산종사의 법문을 직접 받들었고 시자로 부터 발로 굴리는 법륜대와 요가시범을 보고 익혔다. 나도 그 때 선물로 받은 법륜대를 때가 절이도록 굴렸고 지금도 곁에 두고 있다.

야외 법잔치를 마치고 대산종사를 따라 논둑길로 늘어서서 계룡산 계곡으로 향했다. 여성들은 위쪽, 남성들은 아래 쪽 계곡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인자한 대산 할아버지와 함께 계곡 물에 발을 담그고 수박을 먹으며 법담을 나누는 은총을 누렸다.

교단이 신도안 터전을 국방부에 내주고 벌곡으로 갓 옮겼을 때였다. 우리 내외가 인사를 드리자 돌멩이 하나를 선물로 하사했다. 키가 40센티 정도 되는 그 돌은 대산종사께서 건강을 위해 산에 다니며 약초도 캐면서 주워온 것이었다. 나는 그 뒤에 이사를 다섯 번이나 하면서도 그 돌만은 항상 챙겼다. 지금 기거하는 전원주택에서도 더불어 살고 있다. 처음에는 작은 연못 속에 놓아뒀다가 최근 연못가 화단 위에 옮겨놓았더니 가까이서 요모 조모 살펴볼 수 있어 더 친근감이 생겼다. 꽃에 물을 줄 때 그 돌에도 뿌려주었다. 어느 날 자세히 살펴보니 전면은 만물상으로 보였고, 뒷면은 고래가 입을 벌리고 하늘에 기도 올리는 모양이었고, 측면은 금강산의 뾰족한 신선암을 연상케 했다. 나는 12년 동안 근무한 경제기획원에서 1974년에 창설한 국토연구원에 해외과학자 초빙 신분으로 자리를 옮겼다. 80년대 중반 부원장으로 승진했으나 원장 자리를 놓고 외부에서 밀고 들어오는 세력에 밀려 낙방하고 말았다. 내 삶에 최악의 시련을 당하고 대산종사가 계시는 완도훈련원으로 찾아갔다. "빚을 갚았다고 생각하고 돌아가서 부원장직을 잘 수행해라. 그러면 더 좋은 승진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다"는 말씀을 위안 삼고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그 뒤에 KDI에 잠시 몸을 의탁하고 있는 터에 한국해운산업연구원의 제의를 받고 원장에 오르게 됐다. 원장 취임 인사차 왕궁 비닐하우스로 찾아가 뵀다. 별로 말씀도 안하시고 '함께 걷자' 하시기에 따라 나섰다. 손을 꼭 잡고 걷고 또 걸었다. 내게 2% 부족한 기를 불어 넣어주심 같았다. 손에 온기가 전해왔다. 그리고 1997년 8월 문민정부에 해양수산부 장관직에 오르게 됐고 재직 중에 서울시장을 만나 우이동수련원 허가의 물꼬를 트는데 미력을 보태게 됐다. 대산종사의 큰 은총에 작으나마 정성을 표하게 된 것 같아 위안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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