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산종사가 동지를 간호하며 결핵에 감염됐던 중앙총부 송대.
결핵에 감염되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해서 우리나라 어느 곳이든 폐결핵을 앓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가운데 보화당 주무로 근무하던 김서룡이 결핵에 걸렸다.

김서룡은 총부 송대에서 치료를 했다. 전염성이 있는 결핵이었기에 집으로 돌려보내자고 하는 의견들도 나왔다. 정일지·박장식과 함께 대산종사가 간호하다가 대산종사도 결핵에 감염되어 결핵 2기가 됐다. 대산종사의 나이 서른 살 이었다. 김서룡은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원기28년 11월에 열반했다.

대산종사는 치료에 정성을 다했으나 병세가 더욱 악화됐다. 정산종사가 서울로 가서 치료하라고 하여 원기29년 서울교당으로 가서 치료하기 시작했다.

극도로 악화된 건강은 한 걸음도 걸을 수 없고, 겨우 미음으로 연명하는 극한의 투병 생활이었다. 죽음의 벼랑에 서 있었지만 절망이나 허무를 느끼지 못했다.

일체를 천지에 맡기고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진리께서 우주의 대권을 부여해 주시고 만 생령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병마와 싸우며 기도하던 어느 날 '함양대원기(涵養大圓氣) 보보초삼계(步步超三界) 함양대원기(涵養大圓氣) 염념도중생(念念度衆生), 큰 일원의 기운을 함양하여, 걸음걸음 삼계를 뛰어넘고, 큰 일원의 기운을 함양하여, 생각생각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대원주(大圓呪)'가 떠올랐다.

그 후부터는 생명을 하늘에 맡기고 대원주를 주문으로 삼고 외웠다.

대산종사는 투병 중 죽음을 가까이 느끼면서 '생래(生來)에 생불생(生不生)이요 사거(死去)에 사불사(死不死)로다. 불생(不生)이라 불멸(不滅)하고 불멸(不滅)이라 불생(不生)이로다'라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이치를 깨달았다.
▲ 대산종사가 요양했던 서울교당 옛 모습.
요양하며 적공하다

서울교당에서 5개월의 요양을 하고서야 대산종사는 조금은 생기를 찾은 것 같았다.

이때 황정신행이 경기도 양주 자신의 별장에 가서 요양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주위 동지 중에 "기왕 죽을 바에는 총부나 고향에 가서 죽지 뭐하려고 양주에 가느냐!"고 충고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대산종사는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산 좋고 물 좋은 양주로 가서 낮에는 감자로 끼니를 때우고 저녁에는 죽을 끓여 먹으며 요양했다.

양주에 처음 갔을 때만해도 10m도 못 걸었으나 점점 기운을 회복하고 걸음 연습을 하여 50m에서 100m까지 걸을 수 있게 되자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매일 망태 하나 짊어지고 산천으로 다니면서 선정(禪定)에 들기도 하고 밤이나 낮이나 기도하고 약초 캐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대산종사는 이 천지 안에 자신보다 한가롭고 재미스러운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몸은 병들었지만 마음만은 허공법계를 걸림 없이 소요자재(逍遙自在)하는 자신을 보며 한편의 시(詩)를 읊었다.

'대지허공심소현(大地虛空心所現) 시방제불수중주(十方諸佛手中珠) 두두물물개무애(頭頭物物皆無碍) 법계모단자재유(法界毛端自在遊), 대지허공은 마음에 나타난 바요 시방제불은 손안에 구슬이로다 이치와 사물에 다 걸림 없으니 법계를 터럭 끝에 놓고 자유로이 놀더라.'

양주에서의 생활은 오롯이 한 생각 뭉치고 맑히며 밝히는 데만 온 정력을 쏟을 수 있었기 때문에 대산종사는 병을 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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