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종사의 집안은 아버지의 금광사업 실패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점점 가세가 기울었다. 무엇인가 정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단계에 이르렀다. 이때 소태산대종사의 배려로 사가 살림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휴가를 얻어 좌포 집으로 갔다.

대산종사는 아버지로부터 도장을 받아 부채를 정리해 나갔다. 전답을 정리하고 일부는 식산은행(殖産銀行)에 설정하여 갚아 나가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부모만 고향에 그대로 있으면서 남은 농토를 관리하도록 하고, 정토 이영훈과 동생들을 총부 구내 신영기의 집을 세 얻어 이사하도록 하였다.

원기22년, 사회적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킨 백백교(白白敎)사건이 터져 일제의 종교탄압이 더욱 극심해졌다. 이처럼 어지러운 때 불법연구회가 행여 의심의 여지를 갖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소태산대종사는 금강원을 조실로 사용했다. 금강원은 총부 도량에서 가장 깊은 곳이었다. 교주가 깊은 곳에 있다는 것으로 일제에게 헐뜯는 구실을 주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소태산대종사가 영춘원(현 종법실)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그런데 영춘원이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어서 옮겨야 하는 형편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영훈은 남편인 대산종사에게 자신이 세 들어 살고 있는 방을 내놓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희사도 하는데. 이 집을 총부에 내 놓아야겠습니다."

그때 이영훈이 세 들어 살고 있던 집(현 구정원) 주인인 신영기가 집을 교단에 희사하여 사무실이 이 집으로 와야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 같았던 것이다.

"아, 좋은 생각이오. 대종사님께 말씀드려야겠소."

대산종사가 소태산대종사께 살고 있는 집에 대하여 말했다. 그러자 소태산대종사가 부인 십타원 양하운을 불렀다. 양하운은 방이 셋인 집에서 한 칸은 결혼한 딸 박길선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소태산대종사가 양하운에게 큰 아들 광전이가 쓰던 방 한 칸을 영훈에게 주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해서 양하운, 박길선, 이영훈 세 가족이 한 지붕 아래서 살게 됐다. 영훈의 식구는 스물세 살에 낳은 첫딸 복균, 그리고 시동생들까지 8명으로 대가족이었는데 시동생들은 밥만 집에서 먹고 잠은 총부에 가서 자게 됐다.

-대산종사의 〈구도역정기〉 내용 중에서 정리한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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