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 내가 설사 죽더라도 낙망하지 말아라"

▲ 추모순례 참가자들이 소태산대종사 성탑에서 기도를 올린 후 원광대사거리-삼양라면-남중동 소나무 길-마동-이리화장장터를 순례했다.
6월은 교단과 국가적으로 추모의 달이다. 올해는 소태산대종사 열반 71주년이기도 하다. 6일 중앙교구 청운회 주관으로 익산성지 일대에서 추모순례가 열렸다. 대종사를 다시금 마음에 모시는 추모순례를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진행한 것이다. 6일 추모순례에 동행하며 '스승님의 유훈'을 마음에 새겨봤다.

원기28년 6월1일 오후2시30분 경 이리병원에서 열반한 소태산대종사. 오후 3시경 중앙총부에 대종사의 열반 소식이 전해졌다.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제자들은 정신을 수습한 후 9일장 장례를 계획했다. 그러나 일경(日警)은 6일장으로 단축해 시행하라고 했다. 그에 따라 6일 오후1시 운구행렬은 시작됐다.

이번 추모순례의 시작은 오전10시, 대종사의 발인식 시간에 맞춰 교도들은 중앙총부 대각전에 모여 추모 기도를 한 후 열반관련 상황자료를 합독했다. 이어 사진으로 만나는 추모순례를 한 후 오후1시 운구를 시작한 시간에 맞춰 본격적인 순례를 시작했다.

71년 전 6월1일

추모순례의 첫 발걸음은 구조실(당시 종법실). 교도들은 구조실에 모셔진 대종사 영정 앞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서 앉았다. 교도들이 앉아 있는 곳이 바로 대종사가 평소에 침실로 사용했던 방이기 때문이다. 또 대종사 열반 후 유체(遺體)를 모셨던 방이다.

재배를 올린 후 고요히 앉고 보니 열반당시 상황자료의 순간이 떠올랐다. 그리고 당시 제자들이 대종사의 열반을 받아들이는 광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이공주 종사는 정신없이 조실에 들어가 대종사를 살폈다. 두 귀밑이 푸릇푸릇했다. 이에 "종사주님, 야속하오이다. 이렇게 허망이 가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하고 넋을 놓고 말았다. 조실에 안치한 대종사는 생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김형오 선진은 대종사의 손톱과 발톱을 깎고 면도까지 했다. 평상시와 같았고 몸이 조금 차갑기만 하다고 묘사했다. 김 선진은 스승님의 수염과 손톱, 발톱을 주머니에 소중히 담아 목에 걸고 다녔다고 기록으로 전해진다.

1일 저녁 양도신·정양선 선진이 조실에서 대종사의 유체를 모시고 철야를 했다. 두 제자는 평상 아래에 앉아 대종사의 손을 잡고 엎드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손결은 따뜻하고 살결도 부드러웠다. 돌아가신 것 같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이동진화 선진이 이 광경을 보고 "버르장머리 없이 어른 몸에 손을 대고 있다"고 나무라면 얼른 홑이불로 덮어드리곤 했다. 대종사를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고 있어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양하운 대사모는 대종사를 모신 영구차가 조실 앞에 도착하자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제자들은 울며 뛰는 사람, 바닥을 정신없이 떼굴떼굴 구르는 사람 등 열반 소식을 들은 사람마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제자들은 울고 또 울고 목이 메어 지치도록 울기만 했다.
▲ 제자들이 이리화장장에서 화장하기 전 일제히 묵념을 하고 있다.
열반 전 유훈

6월1일 오후 1시 경. 대종사는 '면회사절'을 해야 할 만큼 병세가 침중했다. 그러나 대종사는 이리병원에 온 황 순사를 병실로 들어오게 했다. 황 순사는 대종사가 의자에 앉아 반기자 "종사님, 밖에서 들은 바는 대단히 위중하다 들었는데 와 뵈니 아프신 것도 안 같은데 꾀병이십니까?"하고 물었다. 대종사는 2~3일 전에 있었던 경찰서장 회의 내용을 물었다. 황 순사는 "대동아전쟁을 위하여 국민들이 전력에 총집중하라는 회의지 다른 일이 있겠어요"하고 답했다. 대종사는 "우리에 대한 말은 없던가?"하고 묻자 "불법연구회에 대해서는 별 말 없었다"고 응답했다. 대종사는 "이천, 세상이 허망한 거야. 식은 밥 한 덩이가 그리 큰 거 아냐?"며 알듯 모를 듯한 법문을 했다. '식은 밥 한덩이'는 일제를 두고 했던 말이다. 현실의 이익만을 쫒아가는 처사를 경계한 것이다.

5월27일. 이리병원에 입원하기 전 대종사는 "나 보고 싶은 사람은 다 오너라"고 했다. 제자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다. 이에 총부 구내에 있는 대중들이 조실에 모였다. 대종사는 총부 온지 며칠 안되는 학원생들에게 "공부 잘하느냐, 누에가 밥을 잘 먹느냐?"하며 일일이 안부를 물어봤다.

이리병원에서 오후 9시경. 정산종사와 송혜환, 이은석 선진이 있는 자리에서 대종사는 당부했다. "너희들은 내가 설사 죽더라도 낙망하지 말아라." 이 간절한 말에 세 사람은 눈시울을 적셨다. 그렇게 아픈 중에도 제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며 저녁을 온통 고통 속에 신음하며 지샜다.

심지어 입원 중에는 총부에서 기르던 원숭이까지 챙겼다. 대종사는 원숭이가 밥을 먹지 않고 말라간다는 소식에 "원숭이를 살려야지. 서업이는 들어가 원숭이 밥 주거라"하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세심히 살폈다.
▲ 선진들은 굴뚝 사진을 통해 '소태산대종사 응화신은 연기로 화했다'는 기록까지 남겼다.
여름날, 향내가 나는 유체

추모순례에 참가자들은 2시간 만에 당시 이리 화장장터에 도착했다. 지금은 주택가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고 조용한 가운데 풀과 나무가 섞여있는 화장장터를 확인했다. 그리고 참가자들은 당시 사진에 보여진 그대로 대종사의 응화신을 마음속으로 배웅했다. 순간 마음에 적막의 긴울림이 울린다.

당시 화장장에서 시신을 화구에 넣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은행나무 관이 너무 커 화구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스기야마 형사부장 주재아래 탈관을 했다. 관 뚜껑을 열자 이상한 향내가 났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형사부장이 코를 벌렁거리더니 허리띠와 대님을 풀어 유체 허리 밑으로 손을 넣어 냄새를 맡았다.

"이상하다. 향내가 나, 향내가 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여러번 향내를 맡아봤다고 전해진다. 여름날 6일장을 했는데도 추악한 냄새보다는 향내를 풍긴 것이다. 대종사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절대 사리를 남기지 않겠다. 혹 나한테 신기한 것을 찾으려 하지 마라. 그런 제자는 내 제자가 아니다."

6월13일 저녁 11시 경. 상산종사가 이리에 다녀오다 총부가 대낮같이 환하여 불이 난 줄 알고 인근에 사는 회원들을 깨워 황급히 달려왔다. 그러나 화재가 아니라 조실 좌우로 방광(放光)이 충천한 것이었다. 제자들은 봉안한 대종사의 유골에서 나타난 방광을 묵도하고 예배를 하며 염불했다고 전해진다.

원기28년 7월19일 대종사의 종재가 거행됐다. 박문사 주지 우에노쥰에이 스님이 경성에서 내려와 추모 설법을 했다. "대종사주의 열반은 우주의 등불이 꺼진 것이나 같다. 참으로 인류 사회에 불행한 일이다."

대종사 열반 후 71년. 추모순례에 함께한 참가자들은 가슴 속 깊이 법신과 화신불의 대종사를 모셨다. 대적공으로 원기100년을 맞이하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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