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속의 대산종사

▲ 이남현 교무 / 서이리교당
원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입시에 떨어져 집에 있던 20세 무렵, 모친으로부터 대산종사의 인품에 대해 어려서부터 자주 듣곤 해서인지 문득 한번 찾아 뵙고 싶었다. 무작정 완행열차를 타고 대전에 도착해 신도안 가는 버스를 타고 장터입구에 내렸다.

큰 누님인 이덕심 교무가 결핵 요양차 법무실에 근무했기에 사전에 전보를 치고 삼동원에 들어서니 실눈이 내렸고 그날 작은 방에서 하룻 밤 유숙했다. 새벽 좌선을 마치고 모두 눈을 쓸어내는 모습이 매우 신기했다. 아침식사 후 대중 접견이 있다고 해서 바삐 나갔다. 양지 바른 초가집 뜰 앞에 당도해 10여명 손님과 함께 흰색 한복에 겉 옷으로 회색 외투를 입고 털모자에 옅은 보안경을 쓰신 대산종사를 드디어 뵙게 됐다.

교무 한분이 "이 아이가 덕심 교무 동생인데 전무출신하러 왔답니다"하고 나를 소개했다. 대산종사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가 전무출신 잘 하려느냐?"하기에 "예, 잘 할렵니다"고 답하고 넙죽 큰절을 올렸다. 처음 뵌 느낌은 '한국에도 이런 어른이 계시는구나'하는 공경과 신성 그 자체였다.

당시 총무부장이던 김근수 교무에게 출가서원을 말했다. "어디에서 근무하고 싶은가?" 묻기에 "대산종법사가 계신 삼동원에 가고 싶다"고 말하니 "내가 자네 집안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자네는 수계농원으로 가게", 바로 짧게 머리를 깍고 중앙시장에서 작업복과 신발을 사서 수계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지해원 종사를 모시고 출가의 길을 다졌다. 이 모든 것이 대산종사의 하해와 같은 은혜임을 생각하면 지금도 다행스럽기만 하다.

나는 수계농원 생활에서 대산종사가 법문한 '생사즉거래(生死卽去來), 인과즉여수(因果卽與受)'를 의리적으로 증득했다. 23세 되던 겨울방학 하섬을 찾게 됐고, 범산종사가 기거하던 방에 안내 받았다. 여닫이 대나무 문을 여는 순간 방안이 창호지로 도배가 돼 있고, 조금은 울퉁불퉁한 벽면에 일원상을 붓으로 쳤는데 일원상이 입체화되어 원근법으로 초점이 잡히더니 그 초점마저 텅 비워지고 시방이 공해지는 입정삼매를 경험하게 됐다. 6개월 정도 지속되며 영몽을 꿨다. 육지를 끼고 있는 갯벌인데 뒤로 하섬이 보이고 육지를 흘러온 여러 개의 개울물이 물 빠진 갯벌로 들어왔다. 그런데 갯벌 중간쯤에 원두막이 있고 그곳에 대산종사가 좌정하고 있다가 "만법귀일, 일귀하처 소식도 이와 같나니라"고 말했다. 나는 얼마나 좋았던지 오체투지하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꿈이 하도 영명하여 4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히 떠오른다.

원기59년 전무출신 첫 발령을 총부 원예원 주사로 임명 받았다. 그해 초여름 해질 무렵, 원예원 백구가 도로에 나들이 갔다가 뺑소니 사고를 당해 그만 죽고 말았다. 황직평 종사에게 상의 한 후 백구를 중앙시장에 가서 팔고 그 돈으로 제일 좋은 혁대를 샀다. 그리고 그 혁대를 포장해서 대산종사에게 올리니 "내가 백구를 위하여 49일동안 이 혁대를 찰 것이다. 남현이 너는 곧 바로 교무부에 가서 백구 법명증 받아 대각전에서 열반 독경을 해 주고 49일간 천도재를 정성껏 올리라"고 하명했다. 바로 교무부 담당자를 찾아가 '원복구(圓福狗)'라 법명을 받고 목욕재계 후 천도재를 올렸다. "이 생에서 백구의 몸으로 공사 잘 했으니 인도 환생하고 일원대도 정법회상에 출현하여 성불제중하라"고 축원했다. 재를 마치면서 육도사생이 한 지친의 권속임을 일깨워 준 생불의 감화였음을 느꼈다.

또한 결혼을 하고 대산종사가 주석하고 있던 원평교당에 가니 기념촬영을 해 주고, "야들 내외와 장인 장모 금산사 나들이 한번 시켜주라"고 하셨다. 내 생애 처음으로 대산종사의 콘티네탈 6기통 승용차를 타고 금산사 나들이를 했다. 며칠 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대산종사가 30년 전, 나의 모친께 받으신 은공을 내게 되돌려주신 것이 아닌가 짐작이 됐다.

46년 전무출신의 길을 회상해 보면 모두가 대산종사의 하해 같은 은혜다. 참으로 내 모든 것을 드릴 것이다. 합장하고 대산종사탄생100주년 기념대법회를 거룩하게 봉찬했음을 인생 최대의 행복으로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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