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근본은 유상(有常)도 아니고 무상(無常)도 아니지만 나타날 때는 유상의 측면도 있고 무상의 측면도 있다. 그런데 유상이든 무상이든 능이성(能以成)하다. 능이성이란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하는 것도 아니다. 진리의 흐름따라 그저 작용되어질 뿐이다.

유상이란 항상 그 모습으로 있다는 뜻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반면 무상이란 유상의 반대 의미로 항상 그 모습이 아닌, 변한다는 뜻이다. 변하지 않는다는 유상의 측면에서 진리와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이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 근원을 살펴보아도 고유 물질의 성질마저 없는 비움으로 항상 존재해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도 죽지 않고 존재한다. 언제 생겨난 것도 없이 진리와 우주와 함께 호흡하며 말이다. 사람이란 영혼이 육신의 옷을 입은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변하지 않는 진리를 알면 생명과 물질에 따른 작은 변화에 아둥바둥하지 않고 소유의 삶이 아닌 존재의 삶으로 의미있게 살아갈 줄 안다.

진급이 아닌 강급에서의 복은 개가 수천억의
재산을 물려 받은 것처럼 별 의미없게 될 수 있다


한 순간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한다는 뜻의 무상인 경우는, 우주가 춘하추동처럼 변하지만 그 길이가 엄청 길뿐 패턴은 다르지 않다. 생명을 가진 생물은 생로병사로 변화해간다. 이처럼 물체를 가진 것만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형체와 생멸이 없는 영혼들도 내용적으로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 변화가 근간이 되어 천상·인간·수라·아귀·축생·지옥으로 가는데, 보통은 자연의 법칙과 착심이 맞물려 끌려간다. 이와는 달리 맑고 지혜와 힘이 있는 영혼은 끌림이 아닌 자기의 선택에 의해서 자유롭게 오간다.

자유로운 존재가 되려면 삶의 우선 순위를 무엇보다도 영혼의 진급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복은 풍요롭게 하는 데 지나지 않다.

진급이 아닌 강급에서의 복은 개가 수천억의 재산을 물려 받은 것처럼 별 의미없게 될 수 있다. 복을 이해할 때는 자기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차원이어야만 복이 목적이 아닌 영적 성숙의 한 덕목으로 작용한다. 변화의 이치는 이처럼 수행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근간이 되어준다.

진리와 우주가 유상과 무상으로 한없는 세상을 벌여있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원동력은 능이성이다. 수행자가 능이성 즉 '함 없는 마음'으로 우주와 호흡하며 살아가는 것은 진리에 숨결을 불어넣는 모습이다. 능이성을 체득한 수행자는 해야 할 것을 할 뿐, 과거에 묶이지도 않고 무엇을 도모하지도 않는다. 다만 미흡한 것을 되돌아 살펴 채워갈 따름이다. 이처럼 능이성은 수행자에 있어서 해탈의 근간이 된다.

'함 없는 마음'으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철든 수행자다. 우주의 이치와 천지의 도를 삶의 도로써 활용하는 모습은 우주와 호흡해가는 인생과 인격 예술의 극치다.

<삼동연수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