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경철 교도/수원교당

대산종사는 수원교당 교도들과 함께 계룡산 신도안 삼동원에서 처음 뵀다. 첫 인상은 가볍게 웃음을 띤 얼굴에 인자함을 느끼게 하는 아주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산종사와의 만남은 그 후 여름휴가 때면 계속됐다. 여름철마다 휴양지가 바뀜에 따라 여러 성지를 비롯해 대산종사가 관심을 가지고 있신 경치 좋은 휴양지를 방문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황직평 원로교무의 배려로 우리 가족들이 단독으로 뵙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언제나 얼굴에 인자한 웃음을 띠고 별 말씀 없었지만 그냥 뵙는 것만으로 늘 화평함을 얻었고 마음으로 무언의 가르침을 받았다. 한번은 '둘째 아들에게 전무출신을 권장하고 있다'고 말하니 '억지로는 권하지 말라'했다.

신도안이 삼군사령부 후보지로 국가에 수용된 후 여러 해 동안 새로운 삼동원 후보지를 찾는데 수원교당 교도회장이었던 조대진 교도가 대산종사의 하명을 받고 많은 노력을 했다. 그 때 나는 교당 요인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 회장으로부터 벌곡 천호산 아래의 매입 경위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삼동원 후보지가 매입된 후 조 회장이 대산종사를 뵀을 때 천호산 내역을 자세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이미 당신께서 삼동원 후보지를 내정해 놓고 자기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내게 말했다.

새로운 삼동원과 조실이 완공된 그해 여름에도 가족들과 함께 삼동원을 찾았다. 하룻밤을 자고 난 다음 날 조실에서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전날 대산종사를 뵀기 때문에 무슨 일인가 생각하면서 가족들을 데리고 조실로 갔다. 조실에 들어서니 황 원로교무가 '최박사를 은자로 삼겠다고 하니 가족들과 함께 큰 절을 올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가족들과 함께 큰 절을 올렸다.

그 날 이후 원불교를 신앙하는 나의 마음 자세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그 동안 만나 뵐 때마다 아무런 말씀도 없었지만 나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던 것 같다. 내게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신앙과 수행에 정진 적공하라는 무언의 채찍질을 한 것 같았다. 그 때 나는 새벽마다 교당에서 아침 좌선을 하고 있었지만 교리공부와 일상생활 속에서의 실행공부는 게을리 하고 있었다.

그런 다음 얼마 후 황 원로교무는 서울회관에서 대산종사와 인연이 깊은 몇몇 교도들이 공부도 하면서 뜻 있는 사업을 펼치고자 모임을 가지려 하니 한번 찾아가 보라 했다. 모임 날 서로 인사를 나누고 새롭게 출발하는 '대원회' 모임에 참여하게 됐다.

처음에는 매월 마지막 토요일 저녁에 모여 정전 한 장씩 맡아서 공부하여 발표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교리공부를 진행했다. 이때부터 정전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신도형 교무의 〈교전공부〉를 참고해 차츰 심도 있는 교리공부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정전공부를 통해 일원의 진리에 눈이 뜨이고, 이를 실생활에 활용하는 실천적 방법에 대한 연마에 재미를 붙이게 되자 나만이 즐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매주 수요일 저녁에 몇몇 뜻있는 교도들과 함께 수원교당 소법당에서 한 시간씩 정전공부를 하는 모임을 가지게 됐다. 내가 정전공부를 위한 자료를 준비하여 나눠주며 읽고 설명한 다음 자유롭게 토론하는 방식으로 함께 열심히 공부했다.

일 년 동안 공부한 자료를 모으니 '정전공부 길잡이'이라는 한 권의 책이 만들어졌고 이를 복사본을 만들어 교도들에게 나눠 줬고, 그 후 3년 정도 이 정전공부 모임은 계속됐다.

대산종사의 '정전대의'와 '교리실천도해'는 원불교 교리의 핵심을 파악하고 체계적인 공부를 하는 데 좋은 길라잡이 역할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대산종사가 나를 은자로 삼으신 뜻은 아마도 신심이 부족하고 자력이 없던 나를 오늘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고 앞으로 영생토록 계속 정진하라는 대자비의 가르침을 베푼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일은 늘 나에게 공부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채찍이 됐고, 대산종사를 은부로 심사로 받들면서 보은하며 살게 해 준 대은에 깊이 깊이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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