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산종사가 서울출장소장으로 있을 당시 정산종사(중앙)와 백범 김구선생(오른쪽에서 두번째)과 함께.
서울출장소 부임

대산종사는 양주에서 투병생활 중 민족의 숙원이던 광복을 맞게 됐다. 교단은 원기30(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아 '전재민구호사업회'를 발기해 서울·이리·전주·부산 등지에서 일본·만주·중국 등 해외에서 귀환하는 전재동포(戰災同胞)를 위한 구호사업을 전개했다. 송도성이 전재동포구호사업에 몰두하던 중 이재민에게 전염병이 감염되어 원기31년 3월, 40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재가출가 모두의 커다란 슬픔이요, 교단의 커다란 손실이었다. 대산 종사에게는 입지사(立志師)로 모셨던 법형(法兄)의 열반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대산종사는 양주에서 1년여의 요양으로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원기31년 4월 서울출장소 소장으로 부임했다. 교단에서는 서울 남산에 있는 일본인 사찰 약초관음사를 인수하여 '정각사(正覺寺)'라 이름하고 서울출장소라 했다. 교단의 서울 발판지가 새로이 확보되자 재가 출가교도들은 경사라고 기뻐했다. 그러나 법질서가 확고히 잡히지 않았고 여러 가지로 혼란한 사회상황에서 정각사에 도둑이 자주 들어 사람이 살수 없을 정도로 위험했다.

광복 후 쏟아진 고아들을 거두던 황정신행이 보육원을 해보았으면 한다하여 보육원을 '보화원'이란 이름으로 정각사에서 운영했다. 그 당시는 국가적으로도 어려운 시기였지만 세계적으로도 복잡한 때였다. 교단의 여건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대산종사는 진리 앞에 두 손 모아 합장하고 '심원송(心願頌)'으로 염원했다.

원위(願爲, 간절히 원하옵건대)/ 족지답처(足之踏處, 내 발길이 닿는 곳마다)/ 수지무처(手之撫處, 내 손길이 미치는 곳마다)/ 음지향처(音之響處, 내 음성이 메아리치는 곳마다)/ 심지념처(心之念處, 내 마음이 가는 곳마다)/ 개공(皆共, 한결같이)/ 성불제중지연(成佛濟衆之緣, 부처되고 세상 구제하는 좋은 기연이 되게 하여 지이다)
▲ 일본인들의 약초관음사를 인수하여 정각사라 이름하고 서울출장소를 설립했다.
정계 인사들과 교류

어느 날 정각사에 우남 이승만을 위시하여 장덕수·조병옥·김병로 씨 등 정계인사 20~30명이 일시에 방문했다. 황정신행이 보화원 관계로 이승만을 자주 만나는 가운데 계기가 되어 방문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대산종사는 나라의 지도자들과 접촉할 수 있게 되었고 우의를 돈독히 할 수 있었다. 대산종사는 가끔 이승만을 만나러 이화장으로 갔다. 대산종사는 한번 총부를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씨앗이 되어 이승만이 전국을 순회하던 중 이리에 들렀다가 총부를 방문했다. '대종사 성탑'을 참배하고 조실에 들러 정산 종법사와 대담하며 붓을 들어 '성경신(誠敬信)'이란 글귀를 썼다.

대산종사는 박장식과 함께 이승만의 집 이화장에 갔다가 백범 김구와 이시영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대산 종사와 박장식을 '불교혁명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원불교 교단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김구는 한동안 이승만의 이야기를 들은 후 "내가 중국에 있을 때 국민의 정신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핵심 된 불교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원불교가 바로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종교인 것 같습니다"라고 소감을 피력하며 〈백범일지〉 한 권씩을 선물로 받았다. 이화장에서 처음 만난 김구는 그 후 정각사에 자주 들러 중국 상해임시정부 시절의 이야기를 밤늦도록 목 메이며 하였고, 교무들에게 붓글씨도 써주었다.
▲ 이승만 박사와 교류했던 서울 이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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