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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화두 '마음 담론'/ 불교학 관점에서 본 심지와 경계
이 시대의 화두 '마음 담론'/ 불교학 관점에서 본 심지와 경계
  • 나세윤 기자
  • 승인 2014.07.11
  • 호수 17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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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적 선맥 잇고, 점수(漸修)로 대중화하다'
훈련정진의 달 7월을 맞아 '마음담론' 기획을 마련했다. 1주는 현장전문가들이 본 심지와 경계, 2주는 불교학 관점에서 본 심지와 경계, 3주는 심리학 관점에서 본 심지와 경계, 4주는 마음공부사회화 관점에서 본 심지와 경계로 그간 논쟁됐던 마음공부의 원리와 실천방안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일상수행의 요법'은 1935년 신앙문, 수행문이 재정립되면서 9개조의 실천조항으로 처음 등장해 공부 풍토를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이후 〈회보〉 52호(1939년) 일상수행의 요법 1,2,3조에 '심지(心地)'법문이 들어갔고, 다시 〈회보〉 62호(1940년)부터는 '경계(境界)'라는 용어가 추가되면서 현재의 원형을 이루고 있다. 소태산대종사는 〈육조단경〉의 '심지무비자성계(心地無非自性戒), 심지무란자성정(心地無亂自性定), 심지무치자성혜(心地無痴自性慧)'를 그대로 수용하기 보다는 '경계'를 추가해 세간생활을 주로 하는 대중들을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는 일면 중국불교 남종선(南宗禪)의 돈오적 측면을 수용한 것이지만 북종선(北宗禪)의 점수적인 측면까지 아울러 수용해 돈점을 조화시켜 일상의 경계에서 진리를 떠나지 않는 공부를 하도록 했다.

이번 주는 불교학 관점에서 본 심지와 경계에 대해 원광대 김도공 원불교학과 교무와 마음인문학연구소 장진수 교무의 대담이다.

심지·경계의 불교적 수용

김- 일상수행의 요법은 돈오적인 관점에서 점수적인 것을 수용했다. 돈오와 점수를 융통 화해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원불교 수행은 돈오, 점수, 돈오돈수, 돈오점수의 4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마음공부 방향은 하나를 선택해 훈련하는 방법을 취해 효과는 내고 있지만 원리적으로 다른 공백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 수행의 경향성을 보면 돈오점수적인 측면이 있지만 교리 전체적인 내용은 근기에 따라 돈오돈수적인 면도 있다. 대표적으로 처처불상은 지극히 돈오적인 입장이다.

장- 〈회보〉 44호~62호를 거치면서 대종사의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처음에는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자'(〈회보〉 44호)로 제시되었던 것을 '심지가 요란하지 않이 하난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회보〉 52호)라 하여 '심지법문'으로 이를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회보〉 62호에는 '경계'가 들어가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춰 대중 수행에 적합하도록 다시 제정했다. 경계를 빼버리면 돈오적 입장이다. 근기에 따라 공부할 수 있도록 경계를 넣어준 것이다. 사실 돈수(頓修)는 돈오를 전제할 때 무수(無修)와 다르지 않다. 점수도 돈오 이전과 이후에서 방법의 차이는 없다. 다만 관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돈오 후 점수는 시간적 선후가 정해진 것이 아니다.
▲ 마음인문학연구소 장진수 교무.

심지, 어떻게 보나

장- 심지, 즉 성품을 분별주착이 없는 자리로만 보려는 엄격한 견해가 있는 반면에 정할 때는 무선무악(無善無惡)하지만, 동할 때는 능선능악(能善能惡)하다는 법문처럼 그것을 넓게 보려는 견해가 있다.

심지를 좁게 해석하면 처처불상(處處佛像)을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대승불교에서는 진공을 밝히면서 묘유까지 드러내고 있다.

반야사상이 진공 측면을 강조했다면, 불성(佛性)·여래장(如來藏)사상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인정하여 묘유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잠재성을 인정해 준 것이다.

화엄(華嚴)과 선(禪)에 오면 부처의 가능성만이 아니라 이미 부처임을 긍정하는 태도로 발전해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이처럼 법계연기(法界緣起)나 성기(性起)의 관점에서 보면 심지의 폭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김- 심지는 성품, 마음바탕, 자성 등 다 같은 뜻이다. 해석의 범위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심지는 엄격하게 해석해 줘야 한다. 심지를 막행막식(莫行莫食)하는 것까지 긍정해주면 단체나 사회에서 문제가 생긴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진리의 작용인데 무엇이 문제냐, 수행도 필요 없다, 이미 부처인데, 이런 식으로 대중이 이해하면 크게 문제가 된다. 그래서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초입자에게는 식망수심종(息妄修心宗 망념을 쉬고 마음을 닦는 가르침)에서 단계적으로 민절무기종(泯絶無寄宗 일체 없어서 의지할 것 없는 가르침), 직현심성종(直顯心性宗 곧바로 마음을 드러내는 가르침)으로 가르쳐야 한다.

우리의 견성 5단계처럼 수행하게 해줘야 하는데 처음부터 넓게 해석해 주면 현실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경계가 있느냐 없느냐

장- 불교에서 인식은 근(根)과 경(境), 즉 인식기관과 인식대상이 만나서 형성되는 것이므로,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경계(境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인식대상은 흔히 육경(六境)이라고 하는데,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5경을 외경(外境)이라고 한다면, 법경(法境)은 내경(內境)으로써 이는 이전 찰나(刹那)의 의식이다.

유식(唯識)사상에서는 모든 경계는 식(識)의 작용에 의해 생겨난 것(轉變)이다. 즉 경계는 연기된 것일 뿐이다. 유식무경(唯識無境)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대상 자체를 변화시키기보다는 분별망상으로 오염되어 있는 망식(妄識)을 청정한 진식(眞識)으로 전환시키는데 초점이 있다.

그런 면에서 현실경계에 대한 적극적인 실천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 부분이 불교가 현실적으로 취사나 불공의 측면을 상대적으로 강조하지 않고, 현실참여에 소홀하다는 비판을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현재 원불교의 마음공부에 대한 논의도 경계를 진리의 작용으로써 중시하는 태도를 취하든지, 경계가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보든지, 경계를 대하는 태도에 중심이 가 있다.

김- 세면대에 물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돌멩이가 떨어져 파도가 일렁인다. 이것이 경계다.
돌멩이를 건져내야 한다는 생각에 손을 넣는 순간, 또다시 파도(경계)가 일어난다. 그래서 가만히 놔두자는 공부법이다. 반면 고요한 호수(마음)에 기러기가 날아가자 그림자가 호수에 비쳤다.

하지만 기러기가 호수를 지나가자 그림자도 사라졌다. 결국 경계가 내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공부법이 생긴 것이다. 교법은 생활불교를 지향한다. 기존의 불교에서 말하는 심지와 경계의 용어 쓰임에는 다를 것이 없다. 공유하는 측면이 강하다. 다만 우리 안에서 다양한 해석을 수용해 줄 필요가 있고, 장점만 부각하다보면 한쪽의 부족한 측면도 반드시 발생된다. 이런 부분에서 겸허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심지, 해석 엄격하게
넓은 해석 필요하나
사회에 적용 힘들어
균형감각 유지해야

▲ 원광대 원불교학과 김도공 교무.
공부인은 무엇을 수행하나

장- 초기불교에서는 지금 여기의 느낌과 생각 등을 사량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는 호흡, 소리, 단전 등 제3의 대상에 마음을 챙기는 여러 불교의 수행법들과 상통하는 것이다. 인위적인 마음작용, 즉 번뇌 망상을 제거해 더 이상의 악업을 짓지 않도록 해준다.

한편 대승불교에서는 여기에 업력을 뛰어넘는 원력(願力)을 세우라고 강조한다. 특히 서원은 내 마음의 정당한 뜻(意志)이 발현되게 하여 습관과 업력에 끌려가지 않도록 엄청난 에너지를 제공해 준다. 이를 통해 적극적인 선업수행과 이타적 대승행을 전개할 수 있게 된다. 대승불교의 수행에서 서원이 무엇보다도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김- 임제선사의 사료간(四料簡)을 보면 탈인불탈경(奪人不奪境 사람은 없고 경계만 있다), 탈경불탈인(奪境不奪人 경계는 없고 사람만 있다), 인경구탈(人境俱奪 사람과 경계가 다같이 없다), 인경구불탈(人境俱不奪 사람과 경계가 다 같이 있다)로 단계를 나누고 있다.

이런 높은 수준의 단계가 있음에도 단순히 경계에 상처를 안 받았다거나 마음에 치유가 됐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경계에 상처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대단한 공부로 착각해서도 안된다. 다만 자기 부정이 강하거나 패배의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긍정적인 의식을 불어넣는 공부도 필요하다.

보편적인 가르침이 되기에는 과정적인 아쉬움이 있다. 공부의 수준도 경계와 나마저도 잊어버리는 세계까지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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