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인원 교무 / 정관교당
조선이 아직 꿈속에 있고 사람들의 정신이 도무지 열리지 않았던 시대, 진리가 무엇이고 성품이 무엇인지, 자력이 무엇이고 합리가 무엇인지, 남과 나 감사와 보은이 무엇인지 까마득하던 시대에 대종사는 이 조선을 넘어 세계를 향하여 전반세계 그 장엄한 꿈을 현실화시킬 그 성스러운 회상을 시작했다.

그동안 대종사가 가고 선진들이 혈성으로 그 뜻을 받들어 지키고 가꾸며 키워 이만큼 왔다. 순탄하기만 했다면 감회가 있을까마는 지금도 속 깊은 고민과 산적한 과제들을 안고 있으니 산은 높고 골은 깊은 이 시점에 원기100년이라니 얼마나 감회 깊은 말인가!

우리 회상의 성공은 진즉 예언됐다. 우리의 성공은 대종사가 정산종사를 만나고 난 후, 방언 공사 후에, 그리고 혈인기도 후에, 그리고 일원상서원문을 지은 후에, 또 교리도를 직접 만든 후에, 여러 번에 걸쳐 확인했다.

이 사건들 뒤에 대종사는 "우리의 성공은 이로부터 비롯하였도다", "우리의 성공은 결판이 났다"라고 했다. 대종사의 안목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원기70년 이후 불같이 일던 교화 성장세가 주춤거리고 만 것이다. 짧은 교단사를 보면 사람들은 몇 차례에 걸쳐 교단에 실망하고 있다.

우선 대종사 열반 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원불교를 떠났고 원기70년 이후 지속적인 교화 저성장으로 신심이 약해졌다. 공부 길에 확신을 못가지면서 신심이 약해졌고 또 근래 좌산·경산종법사를 거치며 중앙에 대한 신뢰가 현저히 약해지면서 우리 교단이 정말 주세교단이고 우리 법이 만생을 살릴 법인가 하는 데 대한 의구심들이 늘어났다.

문제는 구성원들의 회상에 대한 자기 인식이 얼마나 긍정적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재가교도들도 그렇지만 출가교도들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매우 중요하며 우리 회상뿐 아니라 세상의 미래를 위해 끝까지 남아 있어야 할 불씨다. 불길이 드세면 근처에만 있어도 타버린다. 혹은 몇 킬로를 날아간 불씨가 저도 모르게 이산 저산을 다 태워내기도 한다.

그러나 불씨가 약하면 바싹 말라 스스로 불씨를 빨아들이는 나무가 아닌 한 나무를 옆에 대 줘도 타지 않는다.

안타까운 것은 주변에서 그것도 내부 사람들 상당수가 원불교의 미래에 회의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대종사는 무엇을 보고 회상의 미래를 판단했고 우리는 무엇을 보고 판단하고 있는가? 정확한 수치로 알 수는 없겠지만 대종사 재세 시보다 교단은 외형적으로 비교할 수 없이 커져 있다. 또 세상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열려 있다.

회상의 외형 성장이 희망이 될 수 없는가? 세상이 우리보다 더 열려 있음이 원불교의 비극인가?

그럴 리가 없다. 우리만 바꾸면 되는 일 아닌가? 그동안 우리 일을 누가 이만큼이나 해 주었는가? 마음공부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경계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니 나를 바꾸고 우리만 바뀌면 원불교가 크게 일어서지 않겠는가?

과거는 대종사의 원력과 기운에 힘입어 성장했다. 그리고 선진들의 혈성으로만도 성장했다. 과거를 치장하는 것이 원기100년 성업봉찬이었던가! 이제부터는 대종사와 정산종사의 후광은 없다. 그러니 과거치장이 교화에 별 도움이 안 되는 때다. 교리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시험대에 오르는 시기이다. 교법 실천으로 우리가 크게 일어서고 세상을 크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야만 우리의 생존이 보장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부조리를 떨치고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이것이 원기 100년의 정언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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