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를 이야기 해도 고락 초월하지 못했다면 소용없어'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선과 악을 초월한 자리를 지선(至善)이라 이르고, 고와 낙을 초월한 자리를 극락이라 이르나니라."

모처럼 출가단회에서 V-트레인을 하면서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차가 정차할 무렵 뒤를 돌아보니 서서히 역으로 들어서는 가운데 미끄러지듯 철로만 보였는데 무척 인상적이었다. 자연과 함께했던 기차여행의 즐거움 기저에는 가지런한 철로 두개가 받침이 되어주었기에 가능했구나 하면서 나의 생활을 돌아봤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누리는 수많은 은혜와 즐거움 역시 참마음과 주세교법이라는 두 가지 축 위에서 가능했음을 발견했다.

'지선이란 지극한 선'이라는 뜻이며, 원래 증애가 없고 선악에 걸림이 없는 상없는 마음이다. 보통은 선과 악에 묶여서 생활하기에 조금 나은 사람은 잘한다는 상으로 자만하기 쉽고 못한 사람은 나는 안된다, 부족하다는 상으로 자기비하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전자는 자기만족으로 더 이상 발전하기가 어렵고 후자는 쉽게 포기하여 발전을 그르치게 된다.

인생이라는 끝없는 길에서 지선이라는 큰 자리를 알기 전에는 누구든지 이 양극단을 오고 가며 방황을 해보게 된다. 다행히 지선이라는 성리자리를 대종사께서 여러 가지로 밝혀주셨기에 우리는 자만심도 버리고 자기비하에서도 벗어나 빈마음에 머무르려고 애를 쓰게 된다. 수많은 연습과 훈련의 반복으로 지선을 터득할 때 선악 어느 것에도 머무르지 않는 마음의 자유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정산종사는 "성품을 본 사람은 심량이 광대하고 무변대해하여 아무런 착심이 없기에 어느 누구와도 깊은 원진을 맺지 않나니, 그래서 성품을 본 사람은 대인이요, 보지 못한 사람은 소인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선악을 초월한 심경을 쉽게 밝혀주었다.

'극락이란 지극한 낙'이라는 뜻이며 고에도 걸림이 없고 낙에도 걸림이 없다는 뜻이니, 고락간에 낙도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좋은 일에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나 낮은 일에도 걸림이 없으려면 먼저 마음에서 부동심이 되어야 한다. 부동심이 되면 지혜가 생하게 되고 흔들리지 않기에 순역고락을 수용할 수가 있으며 지극히 고요하여 무궁한 심락이 시작되는 자리이다. 그래서 극락이라 한 것 같다.

성리를 이야기하고 수많은 갑론을박을 하여도 마음에서 착심이 떨어지지 않고 고락을 초월한 낙도생활이 되지 않는다면 어찌 성리에 토가 떨어졌다고 하겠는가

<대산종사법어> 거래편 47장에서 "선하되 선악을 초월한 지선으로 선하시고 즐겨하되 고락을 초월한 극락으로 즐겨하시고 마음을 쓰되 유무를 초월한 묘유로 마음을 쓰시고 임하되 생사를 초월한 열반으로 임하소서"라는 법문이 심봉사인 우리에게 성리를 꿔서라도 보게 해주는 말씀으로 들린다.

<기흥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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