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결집 대불사에 혼신다해

새 회상 7대교서 완간의 실무를 맡아 불멸의 공덕탑을 세운 대성업의 주인공. "이 한생 안 난폭 잡고 살라"는 정산종사와 응산종사의 부촉을 받들고 정남으로 공도에 헌신한 삶. 천부적인 문필과 해박함으로 풍류를 노래하며 일원문화 창달에 앞장 선 범산 이공전(凡山 李空田, 1927~2013)종사.

일산 이재철 대봉도를 비롯한 집안 대대로 우리 교단과 뿌리 깊은 기연은 출가가 당연하게 여겨졌다. 특히 신성이 장한 할머니는 손자를 등에 업고 소태산대종사를 뵙고 '순행(順行)'이란 법명을 받았다.

원기25년, 14세에 정산종사와 형산 김홍철 종사를 따라 안경을 맞추기 위해 총부에 온 것이 출가의 길이 됐다.

그에게 최초로 주어진 직책은 제1대 2대말 결산사무를 보좌하는 서기보였는데 정전편찬을 필경하는 일이 주업무였다. 이 무렵에 대종사께서는 '공전(空田)'으로 법명을 바꿔 주고 "이름 값 잘 하라"는 부촉을 했다.

원기31년 4월 유일학림이 개설되자 전문부 1기생으로 입학해 3년을 수학했다. 이 시절 문학서를 비롯한 독서에 관심이 많았다. 졸업 후 고향에서 복약 중에 6·25를 만나 생명을 부지하느라 경난을 치렀다. 난리가 평정되자 총부로 돌아와 정산종사의 전문시자가 됐다. 10년을 보좌하며 심법을 배우고 법문 수필과 교서편찬을 보필하는 행운을 얻었다.

원기43년 정산종사는 경전결집을 위한 '정화사' 설립을 특별교시 했다. 그는 정화사의 사무책임을 맡아 경전결집의 대불사에 혼신을 다했다. 마침내 원기47년 9월 우리 교단의 만대본경인 〈원불교교전〉이 발간됐다. 이날 교단은 온통 울음바다였다. 이는 정산종사의 4대경륜인 '교재정비'의 실현인 동시에 교단 만대의 법보가 만천하에 선포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후 원기50년 〈불조요경〉, 원기53년 〈원불교예전〉과 〈원불교성가〉, 원기57년 〈정산종사법어〉, 원기60년 〈원불교교사〉와 〈원불교교헌〉을 발간했다. 이를 한권으로 압권해서 원기62년 10월 〈원불교전서〉를 발간해냈다. 또한 초기 교단의 사료인 〈회보〉와 〈월말통신〉등을 하나로 묶어 〈교고총간〉 6권을 펴내는 대불사를 이뤄냈다. 이 공덕으로 대봉도의 법훈을 받았다.

그는 풍류를 알고 시·문에도 능해 '노래부르세' '동방에 새불토' '운수의정'등 70여곡에 이르는 성가는 신앙, 수행심을 일깨우고 있다. 또한 수많은 논설과 수필 등은 교단의 시론을 이끌었다. 특히 오늘날 법인절의 시작이 된 '7월 26일을 기념하자'와 '새 회상 서설' '교사서장'등은 우리 교례와 회상관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원기50년 한국 6대 종교인 대화에 고산 이운권·팔타원 황정신행종사와 교단대표로 참가해 한국종교인협회가 창설되는 역할을 했다. 원기55년에는 세계종교자 평화회의에 참가해 대산종사의 세계종교연합 창설을 제안하며 정산종사의 삼동윤리 실현에 앞장섰다.

또한 역사의식도 남달라 중요사적지의 보존과 비문, 선진문집 서문 등을 통해 후대에 길이 남을 보본정신의 모범을 보였다. 원기71년 회갑을 기념해 그의 시·문을 모아 발간한 〈범산문집 범범록〉은 개인의 기념문집이라기 보다는 우리 교단의 소중한 문헌 자료로 후세에 그 가치가 더욱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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